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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Feb 03. 2024

2009년의 하루

 나는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 8시 10분경에 나선 문밖은 흐린 하늘로 온통 회색빛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이처럼 우울한 날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문득 했지만, 내가 마음속으로 떠올린 '우울'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린다. 정류장 앞에 섰을 때 하늘에서 조그만 점 같은 빗방울 하나가 내 위로 떨어진다. 아, 나 우산 안 가져왔는데. 며칠 전부터 뉴스에서 들은 장마 전선이 다가온다는 아나운서의 말이 떠올랐다. 이러면 엄마가 왜 비 맞고 다니냐고 잔소리할 텐데, 하는 생각에 벌써부터 한숨이 새어 나온다. 잠이 덜 깬 뒤통수에 무언가를 둔탁하게 맞은 듯한 정신없는 기분이다. 아무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욕을 짧게 하고 마을버스가 도착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마을버스는 속도를 줄이며 나에게 다가온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먼저 탄 사람은 동전을 요금으로 낸다. 요금으로 지불된 동전은 역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통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버스 좌석은 이미 만원이라 흔들거리는 작은 버스 안에서 엉거주춤하게 들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다시 한숨을 내뱉지만 엔진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엔진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언덕길을 올라가고 굽은 길을 지나간다. 흔들거리는 몸을 고정한 채 멍을 때리고 있으면 학교에 도착한다. 비는 아직 오지 않는다. 마을버스에 내리자마자 만난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교문으로 들어간다. 오늘도 시작이구나.


  나는 수업을 듣고는 있지만 같은 반 친구들이 떠드는 것에 더 집중한다. 누군가가 웃긴 이야기를 하면 큰 소리로 웃는다. 화장실 유머, 놀림감이 되는 친구를 놀리는 말, 뜬금없지만 패기 있는 말, 싱거운 말장난들에도 모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지만, 내가 유일하게 정색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적인 유머이다. 우리가 남자 중학생이라고 해도 성교육을 모두 받은 어른에 가까운 학생들인데, 선생님이 그런 유머에 웃지 않듯이 나도 똑같이 그래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재치 있다고 생각하는 말에는 작은 소리로라도 웃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웃다가 보면 내가 느꼈던 압박감과 스트레스, 아직 우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어두운 감정이 일순간에 사라진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자주 웃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a라는 친구가 더 재밌는 거 같지만 b도 항상 실망시키지는 않네. 그리고 c라는 친구도 이런 상황이 오면 항상 웃기는 말을 한다니까. 이런 평가 아닌 평가를 하며 혼자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수업 시간에 집중을 하긴 하지만 필요한 만큼만, 마음이 가는 만큼만 열심히 한다. 모든 선생님이 좋은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선생님을 놀림감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된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항상 선생님께 버릇없이 구는 친구들을 볼 때 속으로 그러지 말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선생님들을 더 골탕 먹이거나 선생님들에게 반항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오늘도 수학 수업 중에 누군가가 도를 넘는 행동을 해서 아주 무거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한 친구가 해온 과제가 수학 선생님에게 상당히 만족스러워서 그 상황을 잘 넘겼다. 6교시가 끝나고 청소까지 마무리하고 학교 교문밖을 나선다. 집으로 가면서 점심시간에 했던 한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그때 궁지에 몰렸을 때 이렇게 말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저렇게 빠져나가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반복한다. 그리고 a처럼 재밌고 b처럼 축구를 잘했으면 아니면 전교 1등의 걔처럼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다 보면 집에 도착한다.


  집에 도착해서 tv를 켜니 오늘은 비가 오지 않지만,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뉴스 기사를 듣는다. 그리고 곧 있으면 기말고사이고, 오늘은 시험공부를 하지 않을 것이지만, 계획 정도는 세워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채널을 돌리며 이것저것 재밌는 것을 찾아보다 보니 벌써 저녁이다. 엄마가 저녁밥을 차려주신다. 집 안에 있는 것이 정말 편안하고 안락하다. 어딜 나가고 싶지도 않고, 집 안에 필요한 모든 게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베란다 창문을 앉아서 바라보며 멍 때리며 사색하기도 한다. 주로 잡생각이긴 하지만, 내가 되고 싶은 게 무엇일까, 공부를 잘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같은 꽤 진지한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는 역시 우울하지 않다는 마음이 든다. 밤이 되고 형과 요즘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2층 침대로 올라가 눕는다. mp3에 연결된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는다. 듣는 노래들은 다 사랑에 관련된 것들 뿐이다. 사랑이 뭘까? 얼마 안 가 잠기운이 오기 시작한다.



메인 이미지 출처 : 서라벌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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