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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Feb 08. 2024

스무살의 추억 中

망상섬 표류기

  '수치심'의 바다에서 표류하던 스무 살 무렵. 물살에 휩쓸려 겨우 닿았던 곳은 '망상'이라는 신기루 비슷한 육지였다. 무척이나 넓고 광활한 곳 같이 보였지만, 실제로는 몇 평 안 되는 갑갑한 곳이었으며 실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생물이 등골이 오싹해지는 소리를 내었다. 가끔씩 밤에는 하늘 위로 은하수가 흐르고, 별이 촘촘히 박혀 있을 때도 있었지만, 나에게 낭만이란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고 말하듯이, 그 섬은 사무치게 춥고,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가끔은 정체를 알수 없는 보라색 빗줄기가 쏟아지곤 하였다. 형체를 가늠하기 힘든 괴생물체의 실루엣이 저 멀리 보이다가도 어딘가로 자취를 감다. 마치 무인도에 떨어진 현대의 문명인처럼 나는 그 망상이라는 이름의 섬에서 살아남고 빠져나오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했으나, 내 손에 있는 편리한 도구는 아무것도 없었다.


  언젠가는 물살에서 뗏목에 실린 무전기가 휩쓸려 다가왔다. 그 무전기는 나에게 이것 저것 하라고 지시하는 다급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나에게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실제로 나를 걱정하고 위하여 주는 듯 했으나,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무인도를 빠져나가는 것에도 그렇고, 무인도 안에서 지혜롭게 생존하기 위한 것에도 그렇다. 당시의 나에게는 다만 귀가 아프도록 따갑게 고함을 치고, 기분 나소리를 냈을 뿐이다.


  결국 나는 그 바다의 물결에 뛰어들 자신도, 무인도에서 살아남아서 구조를 기다릴 용기도 없었다. 나는 정신을 잃고 쓰려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꺼풀은 점점 잠겨왔다. 무전기는 쓰려져 있는 나에게 역시 큰 소리로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낸다.  이것 저것 하라고 고함을 치고, 그제야 괜찮냐고 물어본다. 그러나 그런 말에 대답할 여력이 없다. 나는 결국 기나긴 잠에 빠져든다. 정말 깊고도 고요한, 숨소리도 잘 내지 않는 그런 잠이다. 수치심의 파도 소리와 망상의 섬에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새소리를 배경으로 한 채 잠에 들었다.



  깨어나 보니, 나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병원에 누워있었다. 사실 수치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병원이 있는 문명으로 돌아온 나는 나를 그렇게 괴롭혀 왔던 수치심의 바다는 잊은 채, 외로움과 씨름하고 고독에 눌린 채로 하루를 보낸다. 세상은 나라는 존재에는 관심이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청결한 제복을 입은 간호사들은 마치 유령처럼 '정신 병원'이라는 세계를 음울한 모습으로 발소리를 감추며 떠돌아다닌다. 그들은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자그마한 알약을 내 손 위로 건넨다. 그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나를 이 곳에서 구원해 줄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서, 차라리 내가 있었던 '망상' 섬으로 돌아가볼까 고민도 하면서,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다 보니까 결국엔 퇴원을 한다.


  집과 동네에는 무전기에서 들려왔던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살고 있다. 여전히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짐을 진 채로 터벅터벅 걸어서 집에 도착한다. 나는 이 짐을 그들에게 맡겨 두고 싶지만, 전혀 맡길 수 없다. 그들도 삶이 바쁘고, 고된 노동에 찌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트레스 수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툭 건들면 신경질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더 이상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짐을 대신 져줄 사람이 없음을 깨닫는다. 나는 정신 병원은 생각하기도 싫고, 망상섬의 기억도 더 이상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내가 짊어진 삶의 무게라는 것에 익숙해지려고 했다. 삶의 무게란 결국 외로움과 고독이 내 어께에 짓누르는 중력임을 깨달아 가며,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며, 나이를 먹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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