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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Feb 15. 2024

가평, 조촐한 생일잔치

  외할머니의 생신을 기념해서 외갓집 친척들이 새 집에 모였다. 외할머니의 장남인 첫째 외삼촌의 집이였고, 가평의 신축 아파트이다. 집들이 겸해서 먼저 도착한 우리 가족은 아파트를 구경했고, 뒤로도 젖힐 수 있는 리클라이너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서 TV를 봤다. TV에서는 동남아인지 아프리카인지 모를 나라를 여행하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농사꾼들이 수작업으로 볏짚을 털고, 낟알을 맨발로 밟아서 껍질을 까는 장면이 이어졌다. 


  외숙모와 엄마 h씨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TV로 예능을 보면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나의 아빠인 s씨를 따라서 빵집에 갔다. 가평의 한 유명한 빵집에는 먹음직해 보이는 빵들을 많이 진열하고 있었다. 바게뜨, 크루아상, 치아바타, 에그타르트까지. 대표메뉴인 연유 쌀 바게트를 포함한 빵을 세 가지 고르고, 계산대에 갔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점원들이 쟁반에 담긴 빵을 포장하고 계산을 도와줬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지 가족을 도와서 일하는 건지, 중년으로 보이는 여자분과 함께였다. 가평 잣이 들어간 라떼도 한 잔 주문했다. 집에 돌아가서 h씨에게 라떼를 드렸는데, 네꺼는 시켰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수다를 떨며 순식간에 라떼 한 잔을 비워버렸다. 한 모금 먹었을 때 잣 맛이 나는 크림이 맛있었는데, 아쉽게도 h씨에게 드린 이후로 마지막이었다.


  우리들은 멀지 않은 곳에 눈길을 달려 쭈꾸미를 점심으로 먹으러 갔는데, 가족과 건강, 운동, 다이어트, 여행,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 등에 대한 이야기로 한참 웃고 떠들며 보냈다. 솥밥과 함께 나온 쭈꾸미 요리를 비우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식도 모르고 존재도 거의 잊고 지낸지 오랜 친척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건 꽤 괜찮은 일이었다. 작은 외삼촌은 나의 눈을 유심히 보면서 다정하게 몇 마디 건네기도 했다. 우리 중에 두 번째로 날씬한 외숙모는 살 찌는 호르몬인 인슐린에 대한 이야기를 공들여 했다. 정제된 탄수화물을 먹지 말아야 된다는 설명과 함께 살찌는 체질이 되지 않고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가려 먹어야 한다는 당부를 덧붙였다. 외삼촌과 소주 몇 잔을 함께 했다.


  다시 가평의 아파트로 돌아가서 외할머니를 위한 작은 잔치를 치렀다. 외할머니는 여느때와 같은 쑥스러워보이는 실눈 미소로 우리가 케익을 준비하고 성냥에 불을 붙여 85라는 숫자 위의 촛불을 밝힐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박수를 치며 노래를 하고, 노래가 끝나자 외할머니는 촛불을 후 불고 끄셨다. 항상 그려셨듯이,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화기애애하게 보내고 있는 시간을 참 기뻐하시는 것 같다. 별 말씀 안하셔도 그런 기쁨이 조금씩 전해지곤 한다. 등이 굽으셨어도 여든이 넘는 연세에 땅콩, 양파, 마늘, 참깨 같은 것들을 재배해서 우리들에게 택배편으로 부쳐 보내주시는 외할머니. 그런 정성과 사랑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그것이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을만큼 크고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케익과 함께 이모가 가져오신 대게를 가위로 껍질을 까가며 먹었다. 가평의 외삼촌이 구해오신 인삼주는 정말 썼다. 우리는 외할머니의 아들딸이자, 며느리이자, 사위이자, 손자로서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져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집에 가는 길에는 눈이 한참동안 많이 내려서 꽤 두껍게 눈이 쌓여있었다. 가는 중에 길을 여러번 잘못 들었는데, 한번은 후진으로 빠져나오던 중에 밭으로 이어지는 움푹 꺼진 곳에 바퀴가 빠져버렸다. 앞 집에 사시는 아저씨가 오셔서 한번 보더니 사람을 불러야겠다고 하셨다. 보험사 직원을 불렀는데 20분이 안돼서 곧 와서 차를 견인하는 장비를 써서 척척 처리해주었다. 눈길을 운전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겠다.



2023. 12. 30. 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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