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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Feb 18. 2024

완주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

  서울 여의도에서 '동계국제마라톤'이라는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여의도 한강공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행사 본부, 기념품 배부처, 짐 맡기는 곳 등의 부스가 일렬로 늘어선 광장에는 달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열기로 북적였다. 차에서 내려 엄마인 h씨, 아빠인 s씨와 같이 행사장까지 걸어온 나는 몸을 풀 여유도 없이 출발선 앞에 밀집하여 모인 군중들 속으로 합류했다. 합류하기 전 한강공원에 도착하여 한 일은 편의점에 들러서 인스턴트커피를 사서 급하게 마신 것뿐이었다. 8시 30분에 지체 없이 바로 출발하는 분위기였어서 준비 운동이나 무릎 테이핑, 그리고 사진을 찍을 여유는 없었다. 잠시 후 어느새 사회자의 격양된 목소리의 '하프 마라톤 출발' 구령 소리에 맞추어 출발선 주변에서 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뛰기 시작하면서 이어폰을 귀에 끼고, 스마트워치의 달리기 어플을 실행한다. 항상 마라톤 대회 때마다 진행하는 아주 간단한 루틴이다. 시작할 때만큼은 spin doctors라는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텐션을 올리고 몸을 달궈놓는다. 그것까지는 꼭 필요한 과정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가 좋아하는 의식이다. 내가 달리기를 하고 있고, 특히 마라톤 대회에 참석해서 뛰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히 들게 한다. 노래가 끝나고 트렌디한 찬양곡이 흘러나온다. 내가 요즘 자주 듣는 플레이리스트가 한곡씩 순차적으로 재생된다. 기분이 상쾌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팝송, 애정과 추억이 깃든 곡 등이 재생되고,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올 때마다 나는 힘이 절로 난다. 입으로 따라 부르기도 하고, 신이 나서 앞에 가던 사람을 제칠만큼 빨리 달리기도 한다. 음악의 경쾌한 리듬과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따라 온몸에 피가 빠르게 구석구석 돌게 되는 것만 같다. 특히 다리의 걸음은 규칙적인 타악기의 비트가 되어 나의 마음까지도 흥이 돋게 만든다. 지칠 때마다 힘을 내는 건 이제 시간문제인 것만 같다.


  그런데 무리해서 앞사람을 몇 명 제치고 난 뒤였다. 그리고 플레이리스트의 마지막 곡이 마무리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불과 몇 분 전보다 느리게 달리고 있음을 깨달은 건, 내가 5분 전에 제친 금발의 레깅스를 입은 한 여성에게 반대로 다시 추월당한 때부터였다. 페이스가 느려지는 걸 허용할 만큼 많이 달린 것도 아닌데, 페이스가 지나치게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오버페이스로 달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음악의 힘을 빌려서, 그리고 없던 경쟁심까지 발동시켜서 최대한 페이스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10.5km의 중간 반환점을 돌고서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쉬지 않고 달렸다. 이미 완주에 의의를 두고서 달렸던 처음의 마음가짐은 온데간데없고, 떨어진 페이스를 되찾고, 좋은 기록으로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앞서 달리고 있던 2시간 15분이라는 숫자가 적힌 풍선을 달고 뛰는 '페이스메이커'까지도 호기롭게 제쳐버리고 뛰었다. 이것이 다름 아니라 바로 오버페이스임을 깨닫지 못한 채, 내가 결국 맞이하게 될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결국 15km 정도 뛰었을 때였을까. 점점 발바닥이 매우 뾰족하고 예리한 지압판 위를 달리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통증은 기분 나쁜 예감처럼 점점 커져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정도까지 심해졌다. 발바닥의 아치 부분에 뻐근한 통증이 상당했다. 달리는 것을 멈추고 자전거길과 도보 사이에 난 턱에 앉아 보았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서도 서 있는 것은 힘들었고, 걷는 것도 서 있는 것보다 조금 더 힘들었다. 추운 날씨에 찬바람이 불어 엄지 손가락에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을 때 빠른 판단이 섰다. 이건 무리다. 얼른 배번호에 적혀 있는 구급차 전화번호를 시린 손으로 찍어 전화를 했다. 약 10분 정도 뒤에 도착한 구급차는 추위에 떨던 나를 태우러 도착했다.


"완주는... 안 하실 거죠?"


  구급차 운전석에 앉은 남성이 나에게 더듬거리며 질문했다. 나는 약간의 고민 끝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내린 판단이 역시 맞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구급차 뒤 트렁크문을 여니 간이침대와 함께 두 명의 구급 대원으로 보이는 여성 두 분이 나를 맞이했다. 완주를 포기한 사람을 위한 것 치고는 매우 황송스러운 차내의 모습이었다.


  구급대원분은 나를 위해 모포를 건네주고, 낯선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기 위해 몇 마디를 건넸다. 긴장이 풀린 채로 차에 실려 가고 있을 때 반바지를 입은 한 명의 남성도 DNF(완주포기)를 하고 구급차에 올라탔다. 배번호 색깔은 하프마라톤을 뛰는 사람의 것이었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모양인데 추워서인지 양팔을 손으로 감싸 쥐며 약간의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구급대원 한 명이 입고 있던 패딩재킷을 벗어 건네주었더니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DNF를 한 2명과 구급대원 2명 이렇게 4명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고 느꼈는지 구급대원 중 안경을 쓴 중년 여성 분이 농담을 몇 마디 건넸다. 예수가 왜 하필이면 마구간에서 태어났는지 아세요?... 정답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마리아(말이야)라서 그렇단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허허 웃었지만 구급대원분은 자신의 농담에 만족하시는 분위기였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다리 통증에 시달렸다. 다리를 단순히 펴는 것조차 기름칠하지 않은 녹슨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처럼 삐그덕 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낮잠을 2시간 정도 자고, 시간이 조금 지나니,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 아마, 추운 겨울에 준비 운동도 하지 않고 무리해서 뛰었더니 몸이 너무 놀라서 경악을 했나 보다 싶었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진정을 하니 몸 상태는 쉽게 원상복구 되었다. 같이 뛴 s씨와 h씨는 커플런으로 10km를 무사히 완주했다. 완주를 하지 않고 DNF를 한 건 나뿐이니, 날씨와 준비운동은 변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역시 연습이 부족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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