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직장으로 이직하면서 2월 말 연차 소진을 하고 있는 많은 선배 직원들을 대신해 일을 배우면서 그 사람들의 업무를 대신해 주고 있다. 이곳은 3월이 한 해의 시작이라 2월까지 2024년 연차를 다 써야 하는 모양이다. 다양한 업무들을 인계받은 대로 하고 있어서 이게 맞나 두려워하며 실수 없이 민폐 없이 해 나가려 고군분투 중이다.
트레이닝을 계속 받으면서 업무에 투입된 지는 2주가 되었고 매일매일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이 조금씩 생기긴 하는데 '그날'은 정말 이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갑작스레 업무 우선순위가 바뀌면서 점심시간 전에 끝내야 하는 일을 놓고 회의를 들어갔다. 그 일이 원래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분이 주도하는 거였는데 회의시간 이후에는 다른 업무 때문에 그분 대신해본 적 없는 내가 그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속으로 욕을 랩속사포로 쏘며 점심시간을 넘겨가며 업무를 마쳤다. 내 일도 아닌데. 나는 지금 트레이닝 기간인데.. 할말하않. 그냥 입 닫고 빨리 바쁜 업무가 끝나는 오후를 기다렸다. 이미 땀 한 바가지를 쏟은 나는 진이 빠진 상태였다. 3시 이후 10여분 정도 숨을 돌리다 눈치껏 엑스트라 업무에 손을 대고 도왔다. 그렇게 나는 경력직이지만 그래도 이곳의 신규 직원으로 충성심을 보이며 자발적으로 업무를 도왔다. 이 정도로는 부족했을까. 연차 중인 분의 사무실에 업무 관련된 짐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걸 같이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전날 허리를 많이 움직이다 삐끗해 봉침을 맞은 상태였지만 어쩌겠는가. 짐을 옮기고 나니 5시 30분. 다른 업무에 관련된 자료를 읽기 위해 잠시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호출이 와 또 중요치 않은 업무를 지금 하라고 한다. 내 업무를 뒤로 놔두고 자질구레한 업무를 더 하라는 말에 얼굴 관리가 되지 않았다. 요청한 업무를 하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마지막을 퇴근 전 내 업무까지 잘 마무리하고 퇴근을 했다.
처음엔 그저 화만 났다. 이렇게 체계적이지 않게 내 업무도 아닌 남의 업무를 시켜도 되는 것일까. 하루 종일 종종거리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다행히 상부에서도 벌써 나에 대한 칭찬이 들려왔다. 그래..정말 지독히도 엉망이었던 하루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게 도움을 청했던 그들은 정말 바빠서 나의 손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 나는 지금 여기서 구급대원처럼 쓰이고 있는 거구나.
그렇다고 기분이 한 번에 풀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자주 가는 칼국수 집에 가 저녁밥으로 힐링을 하기로 했다. 원래는 엄청 붐비는 곳인데 끝날 시간이 다 되어서일까. 2명의 일행이 있는 테이블 한 개 그리고 나, 이렇게 단출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오히려 좋아.. 나의 힐링 칼국수로 말할 거 같으면 단돈 5,000원에 멸치 육수의 진한 맛이 기가 막히고 손칼국수만의 그 두서없이 굵고 얇은 면들이 얽혀있는 게 너무 매력적이며 이곳만의 땡초 양념장을 넣음으로써 코가 막히게 맵고도 맛있는 녀석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단순하게 파, 김, 통깨가 아주 살짝 올라간.. 날씨보다도 추운 내 마음을 녹여주는 그 뜻뜻하고 칼칼한 한 그릇을 비워가며 나는 아직도 오늘의 회사일에 대해 곱씹고 있었다. 면을 다 비우고 남은 이 맛난 국물이 아쉬워서 사장님에게 메뉴에 써 있던 공깃밥 하나를 추가로 주문하려 했다. 아... 마침 공깃밥이 다 떨어졌단다. 오늘은 정말 운이 없는 날인가 보구나 생각하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혼자 밥을 먹을 때면 언제나 태블릿으로 좋아하는 영상을 켜고 노이즈 캔슬링을 한 채 시청을 하며 천천히 음미하며 식사를 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런 상태로 공깃밥을 놓친 채 자리로 돌아와 앉아 국물을 마치려 숟가락을 들었다. 갑자기 누군가의 팔이 내 시야에서 허우적거렸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나를 향해 뭐라고 하는 느낌은 알 수 있었다. 2명의 손님들이 나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네?"
나는 너무 놀라 이어폰을 빼고 일행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밥을 가져왔어요! 이거 나눠 먹어요. 엄청 많아."
???? 밥을 가져왔다는 말은 무엇이고 그걸 주시겠다는 말씀은 또 한 번 생각의 정지가 오게 했다.
내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중년의 커플은 락앤락에 담긴 잡곡밥을 내 테이블에 척 올리며 적극적으로 권하셨다. 그리고 사장님에게도 양해를 구하셨다.
"우리 밥 이 손님이랑 나눠 먹어도 되지요?"
"네. 그럼요."
사장님의 허락이 떨어 지고 락앤락에 반넘게 가득 차 있는 잡곡밥은 이미 내 코 앞에 와 있었다.
"아.. 그럼 조금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미 괜찮다고 말할 단계는 넘어간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양심상 조금만을 외치며 새 숟가락을 들어 뜨려는 시늉을 했다.
"그거 다 먹어도 돼요. 우리도 전에 공깃밥 시켰는데 그날도 없어서 오늘은 우리가 직접 싸왔어요. ㅎㅎㅎ"
이런 먹잘알의 민족이 있을까. 두 분의 준비성에 감탄을 했다.
나는 두 숟갈을 퍼서 국에 말고 공손히 밥이 담긴 통을 건넸다. 아직 밥이 따뜻했다. 근처에 사시는 분들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이 맛난 육수에 따신 잡곡밥이라니. 융숭한 저녁이 완성되었다.
회사 일은 내 머릿속에서 지분을 잃게 되었고 나는 뜻밖의 친절로 완성된 나의 저녁밥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그릇을 다 비워갈 때쯤 나의 은인들이 나갈 채비를 하셨다.
"안녕히 가세요. 정말 잘 먹겠습니다!"
나는 다시 생기가 돋은 목소리로 감사를 곁들인 인사를 건넸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칼국수를 사랑하는 한.
이런 인생의 찰나들은 일이 나를 개같이 굴려도 제법 다시 기운을 차리고 살만큼의 멋진 포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우동 한 그릇이 아닌 칼국수 한 그릇의 인생이 내게로 들어왔다.
그것은 정말이지 마법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