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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 Apr 29. 2024

열아홉엔 계절이 없었다

봄이 다시 왔어야 했다. 분명 그랬어야 했을 텐데.


봄은 오지 않았다. 여름은 남지 않았다. 가을은 지나간 지 오래였고,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열아홉이었던 우리에게 날씨는 독서실의 에어컨 혹은 히터였고 기억은 쌓이지 않은 채 흘러가기만 했다. 힘들었던 기억도, 즐거웠던 기억도, 열아홉은 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가장 바쁠 시기에 가장 지쳐 있던 나는 계절이 아닌 한 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글에는 손을 대지 않았고 자소서를 위한 책을 읽었다. 공부를 열심히 했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일 년의 시간은 울음도, 웃음도, 숨소리조차 끊긴 듯이, 적막만이 남았다. 많은 밤을 후회로 지새우고, 후회조차 하지 않던 일 년동안 많은 걸 마음에 묻었다.


꿈 없는 잠을 잤다.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에 잠을 잤다. 대학이란 말은 내겐 꿈보다도 현실성이 없게 들렸다. 난 뭘 하고 싶어서 이렇게 살아온 걸까. 그런 물음조차 가슴에 묻은 채로 연필을 쥔 손을 움직였다. 내게 있는 동기는 오직 두려움. 죽음을 두려워해서 꿈을 품었고 실패를 두려워해서 성적을 올렸다. 그 두려움조차 무감각해진 내겐 살아갈 의지조차 없었다. 그 걸음엔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성적은 되려 떨어졌다. 슬프기보다 오히려 아무 의욕도 없이 여기까지 버텼단 게 신기했다. 높지도 않은 성적을 갖고 서울로 대학을 가기엔 집에 부담을 주기가 싫었다. 애초에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질 모르겠다. 평범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소외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나는 소외된 채였던 걸까. 대학에 가면 또 뭘 해야 할까. 3년만 버티면 된다는 말을 믿었는데 앞으로 몇 년을 더 버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간다고 해서 행복해지진 않는단 사실을 깨닫기까지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 상담을 하기 위해 교무실에 들어갔을 때, 우연히 마주친 수학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 ‘너 같은 새끼가 1등급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는 그 사람의 이름조차 몰랐는데, 그 사람은 날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잠만 자던 내가 수학은 항상 1등급이었던 게 싫었던 걸까. 난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러게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담임선생님의 앞에 앉았다. 왠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담임은 내게 물었다. ‘가고 싶은 과라던가, 하고 싶은 일 같은 게 있니?’ 난 곧장 대답했다. ‘아뇨, 없어요.’ 그 말을 하자마자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나 같은 새끼가 공부를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난 어떻게 살았어야 했을까. 지금도 가끔 생각하곤 한다. 비어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오지 않은 계절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난 지금도 시간이 지나는 게 두렵다. 지금 이 시간도 비어 있는 시간이 될 것만 같아서. 그렇기에 오늘도 난 바란다. 앞으로 올 모든 계절을 간직할 수 있기를, 이제는 제대로 지나간 시간을 추억할 수 있기를, 오늘을 기억하며 내일을 살아갈 수 있기를, 벚꽃이 피는 이 계절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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