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아보카도를 만나려면
남서향으로 난 창에 해가 길게 들어온다. 이 계절에 만날 수 있는 게으른 햇살을 오래 기다렸지만, 늘어난 햇빛보다 차갑고 건조해진 공기는 집 안에 만든 작은 가짜 정원을 가꾸는 일에 언제나 도전 과제다. 화분을 보다 주의 깊게 돌봐야 할 시기. 종류와 크기에 따라 물을 주는 빈도는 반까지 줄여도 되지만, 화분 속 습기는 오히려 더 꼼꼼히 들여다봐야 한다.
신경 써서 살펴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말은 책임감이 늘어난 것을 뜻했다. 책임감은 새로운 취향을 들여 취미라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수고스럽고 품이 들어가는 일을 기꺼이 행하는 것. 책임이란 그만큼의 여유가 생겨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의 작은 용기이자, 또 다른 이름으로 자라난 사랑이었다.
대리로 진급했을 때 부장님이 축하 선물로 스투키를 사주셨다. 사회인이 되어 처음 이뤄낸 작은 성취와 창가에서 가장 먼 복도 자리에 어울리는 소박한 화분이었다. 곧 화분에 '이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스투키에 물을 주는 주기는 한 달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프로그램 반영날에는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그때마다 잊지 말고 물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관이는 7년 정도를 내 옆 자리에서 우리 파트의 공기 정화와 전자파 차단이라는 제 분에 넘치는 소임을 다 했다. 새순이 돋고 잔뿌리가 화분 밖으로 삐져나왔다. 분갈이를 해줄 차례였다. 큰 줄기는 모아서 다시 심고, 새로 난 줄기는 뿌리째 분리해 작은 화분에 옮겨 심었다. 하지만, 이관이는 부서를 옮겨 새로 이사한 자리에서 적응하지 못했다. 화분은 잘 자랄 때도 바꿔주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바꿔줘야 했다.
그 무렵 우리집도 이사를 했다. 베란다를 확장해서 넓게 쓸 거실에 작은 정원을 가꾸기로 했다. 이번엔 별다른 관심 없이 잘 자라면서도 새집에 어울리는 화분을 찾고 싶었다. 스투키 부장님 따라서 가드닝 클래스에 갔다. 보로니아 피나타, 아라우카리아, 립살리스 하티오라, 마오리 코로키아. 이름도 잘 모르는 화분들은 키우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참 많았다. 가끔 흙냄새가 손에 묻어왔지만 아직 집에서는 새집 냄새가 났다.
두 시간 정도의 수업이 끝나면 평소 궁금했던 가드닝 관련 질문을 하거나 집에 들인 화분의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스파티필름, 여인초, 뱅갈고무나무, 몬스테라, 산세베리아. 분명 당근에서 만난 동네 아주머니랑 꽃가게 사장님은 아무데나 냅둬도 잘 자란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잭과 콩나무도 아니고 세상에 그런 식물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역시 마땅히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잭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콩을 구한 거람.
지난여름 마트에서 아보카도를 사 먹었다. 엄마가 골라줘서 그런가 여태 먹어본 아보카도 중에 최고로 맛있는 아보카도였다. 이 아보카도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마침 빈 화분도 있었다. 씨앗을 잘 씻어서 하루정도 물에 불리니 갈색 껍질이 벗겨졌다. 씨눈이 아래를 보도록 물에 담가두고 물통이 뿌옇게 되면 물을 갈아 줬다. 분명 나 몰래 조금씩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시간을 재촉할 순 없었다.
두 달을 기다렸다. 아보카도 씨앗이 반으로 갈라지고 뿌리가 나더니 싹이 올라왔다. 우리집 막내에게 '박카도'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엄마가 크게 웃었다. 박카도는 위로도 길어지고 아래로도 길어졌다. 시간마다 블라인드를 다르게 기울여 들이는 햇살과 염소 성분을 빼기 위해 전날 밤에 미리 받아놓은 수돗물. 이번 용기에서는 다정한 책임감이 자랐다. 나는 이렇게 매일 조금씩 자라는 것을 언제나 사랑했다. 오늘은 화분이 자란 만큼 나도 자랐다.
추울 때 분갈이를 하면 식물도 몸살을 앓는다. 더 늦어지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이 나이 먹고도 쌀알만 한 벌레조차 무서운 나는 혼자서 분갈이를 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12시 전에 만난 거미는 아침 손님이라고 살려 보낸 아빠에게 손님맞이를 부탁해야겠다. 겁쟁이는 비겁하게 아빠가 만든 그늘에 숨어야지. 퇴근길에 내 손 만한 장갑 하나랑 그거보다 크고 단단한 장갑을 하나 더 사 가야겠다. 작은 정원에서 가을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