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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고양이 그림 뚱쭝해요

저도 알아요

by 박애주





최애의 싸인에는 원숭이 그림이 있다. 팬클럽 멤버십 카드와 한정판 앨범,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보 사진과 어느 해의 달력에도 원숭이 얼굴이 그려진 싸인을 받았다. 매번 조금씩 다르게 생긴 원숭이를 만났다. 아주 바쁜 날의 원숭이는 눈코입이 겨우 붙어있었고, 그러지 않은 날의 원숭이는 볼에 하트를 달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줬다.



나도 멋진 싸인이 가지고 싶었다.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문제 풀이가 길어지면, 턱을 괴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쓸 싸인을 그려봤다. 국어 시간에는 내 이름 세 글자를 한글로 잔뜩 기울여 썼다가, 영어 시간이 되면 어설픈 필기체를 버터 발음처럼 굴렸다. 오답 노트 한 귀퉁이에 오답을 자꾸 더했다. 그때는 최애가 싸인에 원숭이를 왜 그리는지 분명 알았는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예체능 하나씩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엄마의 교육 방침에 따라 동네 친구랑 미술 학원에 다녔다. 친구는 그림을 좋아했고, 나는 학원 끝나고 그 친구랑 하는 과자 파티를 더 좋아했다. 미술 선생님은 맨날 친구 그림만 칭찬했다. 늘지 않는 실력을 장비 탓하는 것도 금방 재미없어졌다. 결국 다른 학원에 가서 과자 파티를 했다. 아직 멋진 싸인이 없었으니, 어른이 되는 건 조금 미루기로 했다.



멋진 명함, 멋진 취향에 멋진 싸인까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참 많았다. 동네 친구도 오래 만나지 못했고, 그림을 그려본 것은 훨씬 오래됐다. 회사에서 만난 멋쟁이 친구와 미술 동호회에 들어갔다. 그 친구는 평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취미였고, 나는 요즘도 학원에서 과자 파티를 하는지 궁금했다.











미술 동호회 수업은 직장인의 스케줄에 맞게 한 달에 두 번, 퇴근 후 두 시간씩 진행했다. 수업 과목은 유화, 수채화, 색연필, 드로잉, 오일 파스텔, 아크릴화 중에 고를 수 있었다. 아크릴 물감은 빨리 말라서 그림을 금방 완성할 수 있기 때문에 초보자들이 많이 도전한다고 한다. 캔버스의 크기를 골랐다. 못해도 4절 도화지만 했던 자신감이 한 뼘짜리 캔버스까지 줄어있었다.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아이디어고, 그다음이 관찰력과 표현력이라고 한다. 사진을 하나 골라 선생님에게 보냈다. 선생님은 출력한 사진을 접어서 비율에 맞춰 스케치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살리고, 다른 건 과감히 생략하라고 했다. 얇은 선을 덧대다 확신이 생기면 굵게 선을 그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정답이 따로 없었다.











남들은 원데이 클래스로 하루 만에도 끝내는 그림에 매번 두 달어치의 시간을 꾸준히 담았다. 다람쥐, 강아지, 고양이. 벌써 네 번째 그림이다. 미술 학원 선생님은 잘 그리는 것보다 자신의 캐릭터를 잡는 것이 더 어려운 거라며 응원해 줬다. 나는 이제 제법 물감을 뭉치지 않게 칠할 수 있고, 혼자서 색도 만들 수 있고, 그동안 땡땡이도 한 번 안 쳤다. 칭찬을 받으니 신이 난다. 역시 그림은 취미로만 만나길 잘했다.







으레 화가들은 그림을 완성하면 캔버스 아래나 뒤에 서명을 한다. 나는 화가는 아니지만, 가끔 회의 시간에 부장님 말씀이 길어지면, 턱을 괴고 다음 그림에 넣을 싸인을 그려봤다. 저번에 최애가 그려준 원숭이 얼굴만큼 근사한 싸인을 새로 만들고 싶다.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슬슬 엉덩이가 쑤신다. 쉬는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어른들은 과자 파티 안 할 건가 보다.



엄마가 그림을 아보카도 옆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놓아두었다. 언젠가의 '내 솜씨 어때요' 게시판 가장 귀퉁이에 걸렸을 그림이 오늘은 우리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나를 반긴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시작한 그림자랑은 몹시 쑥스러웠지만 이번에도 용기가 이겼다. 나는 이렇게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뼘짜리 캔버스를 꽉 채우고, 한 줌짜리 용기를 손에 꽉 쥐고.




https://youtu.be/Rr6PYyXlUdQ?

I Love School - 장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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