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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장님이랑? 주말에? 마라톤을요?

2025 조직문화 개선활동 성과보고회

by 박애주





세상에서 나 자신과 싸우는 게 제일 싫다. 싸우기 전 입이 바짝 마르는 느낌과 손이 달달 떨리는 긴장감도 싫고, 패배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승리에서 오는 성취감보다 컸다. 나 같은 겁쟁이랑 싸우는 건 별로 재미도 없고, 이겨서 얻는 큰 보람도 없을 텐데 왜 사람들은 맨날 나 자신과 싸우라고 하는 걸까.



뛰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밖에서 달리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다. 날씨와 옷차림, 코스와 목적지. 야외 러닝은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내가 맘 놓고 뛰는 곳은 콘서트장이나 헬스장 정도. 가끔 콘서트 티켓팅에 앞서 스탠딩을 뛸 체력이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러닝머신을 뛰었다. 내가 무대에 서는 것도, 내 자리가 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오래도록 건강하고 즐겁게 덕질하고 싶을 뿐이었다.








이런 튼튼한 덕질 서사의 앞뒤를 다 생략하고, 주말에 뭐 했냐고 물어보는 옆자리 선배의 지나가는 안부 인사에 '저는 어제 러닝 했어요'라고 말했다. '박 프로 러닝 좋아해?' 지나가던 부장님의 추가 질문이 이어졌다. 답변을 채 고르기도 전에 선배가 대신 나섰다. 우리 선배님은 세심하게도 내가 신입사원 때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0K 마라톤을 다녀온 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머야 선배 저 싫어하죠.








러닝이 정말 인기다. 매 주말 친구들의 스토리를 보면 꼭 누군가는 어딘가의 마라톤을 다녀왔다. 국내 3대 마라톤은 JTBC 서울 마라톤(제마), 동아일보 마라톤(동마), 춘천 마라톤(춘마). 콘서트처럼 내가 앉을자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도 이런 메이저 마라톤에 참가하려면 오픈 시간에 맞춰 티켓팅을 해야 한다. 요즘은 마라톤도 선착순으로 마감되거나 추첨을 하기 때문에 뛰고 싶어도 못 뛰는 경우도 많다.







부서에 단체 마라톤이라는 비공식 연간 목표가 생겼다. 하프 마라톤은 다들 쉽게 엄두 내지 못했고, 10km 마라톤이 인기였다. 내가 내 손으로 마라톤을 티켓팅했다. 성패가 갈렸다. 나는 결제하다 실패한 척했는데, 우리 부장님은 내가 덕후인 걸 아직도 모른다. 사실 나 티켓팅 짱 잘하는데. 다른 대회는 단체 접수가 마감되었고, 바다의 날 마라톤 대회는 개인 접수가 가능했다. 그날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 5km를 신청했는데, 부장님은 다행히 참가에 의의를 두었다.











마라톤은 오픈런도 아니지만 보통 아침 일찍 시작한다. 기온이 높아지면 참가자들의 컨디션에 무리가 될 수 있고, 도심 속 마라톤은 장시간의 교통 통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시 비가 오면 대회가 취소될까 날씨를 자주 확인했는데, 마라톤은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뛰어야 한단다. 온통 내 취향으로 채운 내 방을 내 발로 박차고 떠나려고 하니 눈물이 다 나온다.



케이던스가 얼마고 페이스가 530? 600?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어렸을 때 배운 거리 = 속력 * 시간을 계산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발라드가 많은 최애의 노래만으로는 용기를 내기는 부족해서 에스파-데뷔 5주년 축하해!-의 쇠맛 노래를 채워 넣었다. 대회 일주일 전 배번호가 집으로 배송되었다. 그제야 승부욕이 생겼다. 나 기필코 이 노래가 다 끝나기 전에 결승선을 통과해 뒤도 안 돌아보고 집에 돌아오리라.







바다의 날 마라톤 대회의 집합은 토요일 아침 7시 반, 상암동 월드컵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모였다. 집에서 집결 장소까지 가는 시간이 나의 평소 5km 기록보다 더 오래 걸렸다. 맨날 비즈니스 캐주얼만 입다가 형광색 운동복을 입은 선배들을 만나는 건 새로웠지만, 오늘 컨디션이 어떠냐고 물어보는 부장님의 말에 지금 당장이라도 집으로 뛰어가고 싶다고 했다. 부장님은 아마 지금도 장난인 줄 알 거다.







그래도 나온 김에 사진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혼자 인증샷을 찍었는데, 부장님이 다 같이 한 장 찍자고 했다. 손 위로 하트를 만들자는 결재를 올렸다. 어색하게 상기된 얼굴들이 고장 난 듯 삐그덕거렸지만, 뛸 때 얼굴로 뛰는 거 아니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5km 코스가 먼저 출발했다. 그동안 오다가다 눈인사만 나누던 선배들이 하이파이브를 해줬다. 내가 아는 준비 운동에는 이런 거 없었는데. 앞으로 회사에 다니면서 이렇게 큰 응원을 언제 다시 받을 수 있을까.







5km 마라톤은 러닝 초보자도 쉽게 도전할 수 있어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한다. 가족 단위의 러너,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러너, 다른 사람들의 보조를 받아 뛰는 러너도 있었고, 나처럼 완주가 목표인 러너도 꽤 있어 보였다. 대부분의 5km 마라톤은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의 건 타임(Gun Time) 말고는 공식 기록을 체크하지 않는다. 기록과 상관없이 피니시 라인에서 배번호에 완주자 표시를 받았다. 퍼스널 베스트(PB)를 내지는 못했다. 근데 그동안 나 회사에서 숫자만 보느라 더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마라톤 완주 기념품으로 메달과 간식 그리고 멸치를 받았다. 원래 몸도 눈도 무거워져서 집에 바로 가려고 했는데 코스를 바꿨다.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고 있으니 선배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아까 빌린 하이파이브를 하나둘 돌려줬다. 부장님이 뒤풀이를 하자고 했다. 우리 부장님은 그렇게 뛰고 와서 다른 것도 달리고 싶으신가 보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동메달 용기를 자랑한 다음 씻고 나와 눈물을 똥똥 흘리면서 같이 멸치 똥을 땄다. 눈에서도 손에서도 바다 냄새가 났다.



요즘 같은 날이 딱 달리기 좋을 때라고 하지만, 나는 이번 주말엔 최애의 예능을 처음부터 다시 보기하고 본방도 이어 볼 거다. 아무래도 나는 이 마라톤이 제일 좋은 것 같다. 그치만 밖을 보니 단풍이 참 예쁘더라. 친구들의 오운완 인증샷을 보니 나도 뛸 걸 그랬나. 아니아니, 시간이 지나니까 기억이 많이 미화되는 것 같다. 사실 내가 그날 가장 많이 들은 노래는.




https://youtu.be/27_Aa7VBpoc?

눈물에 얼굴을 묻는다 - 장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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