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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골퍼 성공기

아자씨 다시 칠게유

by 박애주





퇴근길 지하철 플랫폼에서 휘청이는 부장님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취했거나 혹은 치려거나. 우리 부장님은 둘 다였다. 회식을 하고 법카를 긁어야 할 시간까지 부장님이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가면, 십중팔구 어디 구석진 흡연 구역에서 다른 부장님들이랑 빨간 얼굴로 열심히 허리를 돌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아저씨들의 루틴을 잘 알게 되었는가. 아아- 때는 바야흐로 2019년이었다.



그때 얘기를 하기 전에 조금 더 옛날얘기를 먼저 해야 한다. 나 친가의 끝사랑이자 외가의 첫사랑으로 박씨 가문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시절, 영원할 것 같던 그 호시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처음 몇 년뿐이었나니. 곧 나의 온 세상을 반띵해야 할 동생이 태어났다. 동생은 엄마 아빠 몰래 덕질이나 하던 나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멋진 것을 많이 도전했다. 걔는 더 넓은 세상을 찾아 외국으로 떠났다. 동생을 만나려면 지가 여기로 오거나 내가 거기에 가시는 수밖에 없었다.







멋쟁이 동생이 새로 가진 취미가 골프였다. 나에게도 골프를 배워보라 한 걸 보면 꽤 재미있었나 보다. 동생을 만나러 가서 같이 골프를 치기로 했다. 나는 동생이 하는 건 항상 내가 하는 것보다 근사해 보였다. 본격적으로 레슨을 시작하기 전에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내가 골프용품을 쇼핑하는 동안 골프에 흥미가 없는 엄마 아빠는 식품 코너에서 내 편에 동생에게 보낼 반찬거리를 샀다. 엄마 아빠가 알려준 세상 말고도 우리 둘이 평생 함께할 수 있는 놀이가 생겼다.








당시만 해도 골프의 인기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골프 치는 젊은 친구들을 좋지 않게 보거나 지나친 관심을 주는 어른들도 많았다. 옆 파트 차장님은 나에게 벌써부터 정치 욕심이 있냐고 무례한 구찌-상대의 플레이를 방해하는 말과 행동-를 넣었고, 옆옆 파트 부장님은 그 레슨 프로 말고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을 소개해 준다고 훈수를 두기도 했으며, 우리 파트 부장님은 매주 내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진척을 관리했다.



필드 밖 갤러리들의 방해를 이겨내고 라운딩을 나갔다. 나의 데뷔 무대는 두바이에 있는 엘스 클럽(The Els Club), 통산 70회가 넘는 우승을 달성하며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오른 골프의 전설 어니 엘스(Ernest Els)가 설계한 골프장이었다. 내가 라운딩한 날에 'Fairway Jesus'라 불리는 멋쟁이 프로 골퍼 토미 플릿우드가 다녀갔다고 하는데 나는 그때 골린이라 누군지 몰랐다. 알았다면 모자에 사인을 받았을 텐데 덕후는 계를 못 탄다는 말은 만국 공통이었나 보다.







몇 주간의 벼락치기 레슨은 실력도 자신감도 준비하기에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부족함은 동생이 채워줬다. 어디 나가서 책잡히지 말라고 열심히 설명하는 골프 룰과 매너 수업을 새겨 들었다. 골프고 운전이고 가족에게 배우지 말라고 하지만 동생은 좋은 선생님이었다. 인생은 템전이라고 생각해서 비싼 장비를 잔뜩 챙겨갔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생은 그냥 실전이었다. 쓰고 버릴 공을 가져오라고 했던 선생님 말씀을 잘 들을 걸 그랬다.



성수기에 7분 단위로 뒷팀이 쫓아오는 한국 라운딩과 달리 이곳은 30분마다 티업이어서 부담이 덜했다. 칠 수 있는 채가 몇 개 없어 하프백을 들고 갔는데도 진이 빠졌다. 남들은 72타로도 끝내는 18홀을 산에서 들에서 때리고 뒹굴고 100타 넘게 쳤으니 그럴 만도 하다. 클럽하우스에 도착하니 동생이 볼 파우치에서 골프공을 하나 꺼내줬다. 내가 처음 티샷을 했던 공이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해저드를 뒤지더니 기어코 찾아왔다. 역시 우리 선생님은 멋쟁이다.








골퍼들은 골프 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골프 얘기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 나의 첫 라운딩 얘기를 듣고 부장님들은 연습도 연습인데 어릴 때 잔디밥-필드 경험-을 많이 먹으라고 했다. 라운딩은 부담스럽다고 하니 곧 스크린골프 약속이 잡혔다. 팀을 나눠 맥주 내기를 했다. 오장과 일이, 배판과 사팔이. 내가 배워 온 것보다 골프에는 더 많은 룰이 있었다. Golf is Life. 내가 뭣도 모르고 산 골프웨어에 적힌 말처럼 골프는 인생이고, 인생은 배움의 연속인가 보다.







그래서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는다. 실력을 올리기보다는 내려가지 않기 위함이다. 골프가 덕질과 글쓰기 다음으로 오랜 취미가 될 줄 몰랐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스윙에 집중해 공을 빵빵 치는 것은 스트레스가 풀리기도 하지만 되려 팡팡 돌려받을 때도 있다. 아마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 골프의 재미 아닐까. 아직도 종종 나오는 미스샷에 레슨 프로님은 '이건 초보자들이나 하는 실수예요'라고 말한다. 나는 이제 이 정도 구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맞받아칠 수 있을 구력-잠정구 칠게요-은 갖춘 것 같다.







가끔 혼자 스크린골프를 치러 간다. 라운딩을 나가는 것보다 금전적이나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덜하면서도 재미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요즘 나의 스크린골프 루틴은 볼빅(Volvik)과 에스파(aespa)가 콜라보해서 나온 에스파 골프공을 챙겨가 크러시와 토레타를 마시면서 에스파의 Next Level을 틀어놓고 오른손을 디귿자로 만드는 스윙 연습하기. 즐겨 찾는 코스는 에스파크 CC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채운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운동을 다녀온 건지 덕질을 하고 온 건지 나누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유쾌하게 라운딩 자체를 즐기는 골퍼들을 '명랑 골퍼'라고 한다. 나의 이번 도전은 최애가 처음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 제목과 명랑하다는 거 빼고 공통점이 없는데, 나는 고작 이 두 글자 단어로도 용기를 더 낸다. 용기를 낼 때마다 내 필드가 넓어졌다. 어디에서 샷을 날려도 덕질로 빠져버리는 것이 나의 루틴 아닌 루틴이 되어버렸지만.



가을 골프는 빚내서라도 친다는 말이 있다(왜죠). '박 프로, 언제 한 번 콧바람 쐬러 가야지'라고 말하는 부장님들의 스몰톡은 내게 여전히 공략이 어려운 코스다. 요즘 날이 많이 추워져서 며칠만 웃어넘기면 무난히 내년을 기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그전에 나보다 어린 선생님을 만나러 겨울 전지훈련을 떠나야겠다. 한 4월쯤 되면 용기도 실력도 더 생기려나? 물론 그때까지 나와 내 골프는 계속 명랑할 예정이다.




https://youtu.be/6yRJ9Z_jEDM?

4월 이야기(April Story) - 장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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