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여행을 하고 싶어
하얀 얼굴에 작고 검은 두 눈, 동그란 코. 그 아래 비밀스러운 입꼬리. 단추 두 개 달린 빨간 코듀로이 멜빵바지의 아이코닉한 패션. 그때는 한 팔에 폭 안겼으니 지금은 한 손에 쏙 들어왔으려나. 어린 시절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예삐는 사실 곰 인형이다.
예삐는 기쁠 때나 슬플 때, 건강할 때나 아플 때도 나와 함께했다. 마지막으로 예삐를 본 것이 딱 이맘때쯤이었다.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가려고 엄마랑 예삐랑 택시를 탄 것은 기억이 나는데, 진료를 다 받고 나서야 예삐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엄마는 나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예삐는 내가 챙겼어야 했는데. 잔기침이 더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택시 정류장에 가서 예삐를 본 적 있는지 기사님들에게 물어봤다. 그렇게 해도 첫 이별은 피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귀여운 곰 인형을 많이 만났지만 예삐의 빈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아니,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대망의 포켓몬스터가 나왔다. 엄마가 나와 동생에게 파이리와 꼬부기 인형을 사줬다. 어린아이의 다짐은 151마리 포켓몬의 이름을 다 외우기까지 걸리는 시간만큼 길게 가지 않았다. 불꽃 타입의 도마뱀 포켓몬 파이리. 새 예삐는 내가 만들어 준 이름도 성격도 아니었지만 평생 함께할 친구가 되었다.
소중한 것을 다시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집에 두고 나만 보는 것이 안전했지만, 역시 꺼내서 같이 노는 것이 제일 재밌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겁쟁이였던 터라 인형을 진짜 친구라고 하며 교실에 데려가는 건 부끄러웠다. 왜 다들 어렸을 때 좋아했던 것을 철이 좀 들었다고 유치하다 하는 걸까. 우리는 덜 자란 게 아니라 오래 함께할 취향을 조금 일찍 찾은 것뿐인데도.
어른이 되고 내 취향에 조금 더 단단해지고 나선 여행에 항상 파이리를 데려갔다. 친구와 함께 떠나는 여행만큼 신나는 것이 있을까. 모두가 다녀가는 관광 명소부터 덕후들만 알음알음 찾아가는 성지까지. 파이리는 최고의 룸메이트이자, 사진을 찍을 때도 굿파트너가 되어주었다. 여행을 가면 그 나라 말로 간단한 인사말과 단어를 꼭 하나 알아갔다. 누군가 파이리에 대해 물으면 그 나라 말로 친구라고 답했다.
여행을 다녀오면 남는 기념품 중에 파이리와 찍은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든다. 파이리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 내가 지금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 그동안 내가 나를 어떻게 만들어 왔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새로운 예삐도 이렇게 오래 사랑하게 될 줄 알았으면 예삐를 잃어버렸을 때 엄마한테 혼날까 봐 눈치 보지 말고 엉엉 울어볼 걸 그랬다. 그럼 예삐와 다시 만날 수 있었으려나. 아마 아무도 알 수 없겠지. 내가 얼마나 예삐를 사랑했는지도 아무도 모를 거다.
그리고 나는 최애의 아이돌 에스파(aespa)의 애칭을 예삐에서 데려와 예삐예삐뽀삐예삐라고 불렀다. 내가 입덕했을 때 발매한 <YEPPI YEPPI>라는 노래에서 남모를 반가움이 있었고, 무대 위에서 빛나는 이 친구들도 예삐만큼 좋아하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행에 다녀오면 으레 정리하는 사진 앨범에 내 얼굴만큼 새 예삐들의 얼굴이 가득하다. 나는 그냥 이렇게 아직 모르는 세상을 같이 여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요즘 그게 조금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올겨울에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 최애가 집에 바퀴를 달아 다녀온 바다 건너의 곳이 목적지다. 내 커다란 가방에는 새로운 것도 여전한 것도 전부 들어가는데 이번엔 무엇을 챙겨가야 할까. 나의 오랜 친구에 대해서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해둔 참이다. 이제 인형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거냐고? 아니, 여전히 부끄럽다. 하지만 다행히 요즘 가방에 인형을 키링으로 잔뜩 달고 다니는 반가운 유행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