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튀김은 아침 볕과 색이 같다.” 김유정역의 한 닭갈비집 옆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종겸이 했던 말이다. 빼곡한 별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기억이 난다. 스키를 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교양 수업의 조별 과제로 만나게 된 우린 제법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그런데 그날의 말만큼은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는 걸까.
한 시간 반가량 주어진 점심시간. 사람들과 우르르 밥집에 몰려가는 대신 편의점으로 향했다. 참치 김밥과 쥬시쿨, 라이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담배 한 갑 주시겠어요.” 사본 적이 없으니까, 담배 이름을 말하는 대신 바보처럼 담배 하나 달란 말을 했다. 이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했고, 나는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회사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시기에 맞춰 나도 이것저것을 해 왔다. 공부를 해야 하니까 했고, 대학도 가야 하는 분위기라서 갔고 취업도 그렇게 했다. 사실은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서 대부분의 선택을 거슬러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라는 의연한 태도 말이다. 그럴싸하게 에둘러 표현할 능청스러움도 없었다.
클수록 무뎌지는 걸 누군가는 둥글어진다고도 하던데, 가만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매일 각진 곳으로 향한다. 문도 건물도 사각형. 어쩌면 우리는 둥글어진 게 아니라, 문틀에 각을 맞추며 깎여 나가는 것 아닐까. 애초에 부딪힐 일이 없도록 이미 꼭 맞게 각져버린 채 말이다. 사각형은 밀릴 뿐 구르진 않으니까.
종겸과 스키장에 다녀온 뒤, 서울에 돌아와서 한동안 별을 볼 일이 없었다. 밤에도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고, 다만 탁한 빛이 주위에 가득할 뿐이었다. 당시에는 의아했지만 튀김이 곧 별을 의미한다는 걸 알게 된 건 그와 알고 지낸 지 조금 더 지났을 무렵이다.
우린 종종 집에 곧장 들어가길 싫어했고 편의점에서 네 캔에 만 이천 원짜리 맥주를 사서 잔디마당에 누워 있곤 했다. “남들보다 튈 수 있을까.” 종겸이 맥주의 뚜껑을 따서 건네며 말했다. “꼭 튀어야 하나?” 나는 물었다. “너, 하늘에 저거 보이지.” “별?” “아니, 튀김 말이야.” “무슨 소리야.” “반짝인다는 거 결국엔 튀는 거거든. 그래서 우리가 볼 수 있잖아.” 종겸은 입에 문 담배를 내려놓으며 “뭐 이러나저러나 어때.”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나는 여전히 서울에 살고 내가 본 가장 밝은 밤하늘은 여전히 그날의 춘천 하늘이다. 그런데, 왜. 아침 볕이었을까. 퇴근 후 흡연구역에 우두커니 서서 얼떨결에 사 온 라이터만 달칵였다. 라이터에 불꽃을 유지한 채로 밤하늘에 가져다 대 보았다. 별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실망하며 손을 내려놓을 때였다. 불꽃이 바람에 휘청일 때마다 단단한 나무 기둥이 울렁거렸다. 불을 끈 뒤에는 굳건히 흔들리지 않는 나무를 보았다.
어쩌면, 밤에 잠깐 반짝이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눅눅해지더라도 아침까지 남아 반짝이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집까지 가는 동안 유리창에 기대어 자다가 진동음에 깨서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 종겸이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기름의 온도는 적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