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장을 열고 제일 안쪽에 놓인 컵을 꺼낸다. 얇은 유리컵에 음각으로 새겨진 패턴이 독특하다. 이건 어디서 사 온 거였더라, 그래. 지은이가 가자고 졸라서 들어갔던 소품샵.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르는 나에게는 간판이 곧 그림처럼 보였지.
고불고불하게 꼬인 글자들, 분명 이 간판을 적은 사람은 뒤죽박죽 생각하는 사람일 거라고 짐작한 뒤 까르르 웃었을 적. 사람들은 꼭 두 명씩 짝을 지어서 들어왔고 은은하게 인센스 향이 곳곳에서 나던 기억이 난다. 주홍색 간접 조명을 써서 노을 진 해가 내려앉은 듯한 그곳. 그리고 그곳에서 사 온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반짝이는 컵. 왜 맨 끝으로 밀어뒀을까. 빛을 머금고 있는데도.
해외에 갈 때마다 나는 마그넷 대신 컵을 샀다. 붙을 수 없는 마음을 억지로라도 붙여보는 자석의 일은 조금 슬픈 것 같아서. 어딘가를 떠나오면서 컵의 너비만 한 작은 홈을 판다. 뭐라도 담아보고 입이라도 맞춰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떠나온 곳들에 대한 기억이 얇은 잔의 두께만큼씩 파고들어 나를 감싼다. 그 뒤로부터 나는 점점 조심스러워졌다.
컵은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무겁고 깨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굴러 떨어지면 흘러서 스며드는 습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제야 무거워지는 거 아닌가. 제멋대로의 모양을 꿈틀거리면서, 마음이 새어 나온다. 마른 수건으로 곱게 닦아두었기 때문에 유리의 맨바닥에서는 은은한 광택이 났다.
냉장고에서 라벨이 없는 생수통 하나를 꺼내어 물을 따르려다가 손을 멈췄다. 컵 속에 있던 공기가 한순간 출렁이는 게 느껴졌다. 텅 비어 있어야 하는데 무언가 움직였던 것 같다. 눈을 감았다 떠서 다시 보았을 땐 고요했다. 나는 천천히 컵에 입을 댔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공기는 차갑고 맑았다. 마르지 않을 정도로 남겨둔 채 머리맡에 올려두었다. 새로이 차오르고 있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