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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공선사 Jun 26. 2024

나를 경영하는 금강경season5(17.비설소설분4)

여래가 법을 설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우리가 중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시 혜명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어미래세 문설시법 생신심부

(爾時 慧命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불언 수보리 피비중생 비불중생 하이고 수보리 중생중생자 여래설 비중생 시명중생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 非衆生 是名衆生)


그때에 혜명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미래세에 이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함은 여래가 설하되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


혜명수보리가 미래세의 우리들을 염려하는 것이 결코 여래 못지않다.


후세에 믿는 사람들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하고, 자꾸 우리들이 여래의 이 가르침을 제대로 믿을 수 있겠느냐고 여래께 누차 질문을 드린다.

그래서 여래께서 믿는 사람, 믿지 못하는 사람 모두 결코 중생이 아니라고 마침내 결론을 내려주신다.


혜명수보리가 그것을 모를 리 있겠냐만은, 미래세의 우리들은 여래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므로 여래의 설법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기에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다.


중생이 있으므로 여래의 설법이 있고, 중생이 없다면 여래의 설법 또한 없다.


여래가 법을 설한 것이 없다고 하셨으므로 당연히 이 말씀은 우리가 중생이 아니고, 모두 본래 여래의 모습이라는 것과 같은 뜻이다.


우리가 본래 어리석은 중생이 아니라는 이 위대한 선언은 우리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초래하는 일체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니까.


기독교는 우리들을 '어린양'이라고 하면서 영원한 동물로 단정 지어 놓았다. 그래서 죽기 전까지는 동물성을 벗어날 수 없고 또 그렇게 2,000년 동안 살아왔다. 그래서 환경파괴와 무자비한 살육과 전쟁을 거리낌 없이 자행함으로써 많은 생명들을 생존위기로까지 몰아넣었다. 순한 어린양이면 그나마 좀 봐줄 텐데 사납고 탐욕스러운 어린양이다. 오히려 야수에 가까운 이상한 양(羊)이다. 그리고 스스로 저질러 놓고 모두 사탄이나 악마 탓으로 돌린다. 그러면서 자기 종교를 믿으면 모든 사악한 짓을 다 용서하고 천국에 그것도 죽고 나서 데려가준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얼마나 미개해질 수 있는 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서야 서양인들은 자기들의 잘못된 믿음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불교에 귀의하고 있다.


반면 부처님은 우리와 모든 생명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신성(神性)을 불성(佛性)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찾아 영원히 행복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신다.

그리고 이 지구의 수많은 성현(聖賢)들이 몸소 이것을 체득하고 보여주고 가르쳐주었다.


중생중생(衆生衆生)이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은 더 이상 중생 타령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니, 이는 곧 여래(如來) 타령하지 말라는 것과 똑같은 말씀이다.


중생과 부처, 이 양자를 오락가락하는 것이 진짜 중생이다.


어떤 때는 자기가 불성(佛性)이 있는 것 같고, 또 어떤 때는 자기가 중생인 것 같은 착각을 자꾸 반복하면서 헷갈리는 것은 믿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망치는 길이다.


믿으려면 철저하게 흔들리지 말고 완전하게 믿고, 믿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믿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면 신(神)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영혼을 믿지 말아야 되고, 운명도 당연히 믿지 말아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일관되게 하나의 원(圓)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운명을 믿으면 영혼도 믿어야 되고, 영혼을 믿으면 당연히 신(神)을 믿어야만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겪는 일마다 어떤 때는 믿고, 어떤 때는 믿지 않고, 또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고 한다. 마치 입맛대로 음식을 골라먹는 것과 똑같다.


즉,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완전 뒤죽박죽이며 혼돈이고 자기 멋대로이다.


아무리 상(相)을 자기 자신으로 삼아 물질에 의존해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논리도 없고 논리도 없으니 당연히 초논리(超論理)도 없다. 비(非) 논리만 판친다.


믿는 것은 내 마음이지만 생각을 잘해서 믿는 것과 일치해야지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머릿속에 일관성(一寬性)을 좀 가지고 마음을 운용해야지 동물과 다른 사람 아닌가?

그것이 비록 틀린 사실일망정 동물보다는 나아야지 부처될 가능성이 큰 것이니까.


일관성이 없으니까 공부한다고 무엇을 하나 덧붙이면 더더욱 헷갈릴 뿐이고 공부할수록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래는 지금 '믿어라' 또는 '믿지 말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여래는 지금 '중생으로 살아라' 또는 '부처로 살아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여래는 지금 '그대는 중생이다' 또는 '그대는 부처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단지 중생이든 부처든 간에 '믿는다', '안 믿는다' 하면서 오락가락하며 때를 묻히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중생으로 생각하고 여래의 설법을 믿지 않는다면 고통이 클 것이니 그대에게는 중생 이상의 것이 본래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실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부처님 믿으라고 말한 적이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해 줄 뿐이지. 그 이상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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