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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경영하는 금강경 season1 (8.선현기청분4)

선지식의 법문은 물어보는 상대방에 따라 정반대로 나온다.

불언 선재선재 수보리 여여소설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여금제청 당위여설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咐囑諸菩薩 汝今諦聽 當爲汝說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착하구나 착하구나 수보리여. 네 말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모든 보살들을 잘 부촉하느니라. 너희는 지금 살펴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너희를 위하여 설하리라. 선남자선여인이 아뇩도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면 응당 이와 같이 머물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느니라.


유연세존 원요욕문

(唯然世尊 願樂欲聞)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데 듣고자 하옵니다.


수보리 존자를 비롯한 1,250인의 대비구들은 여래께서 자신들을 잘 호념해주시고 잘 부촉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인류역사상 희유한 일이라는 것을 감탄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여래께서 그렇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법을 설해 주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우리들의 근기에 맞게 설해주신다는 것을 뜻한다. 즉 방편(方便) 설법인 것이다. 그런데 여래가 설하는 방편은 실체(實體, 진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가 방편으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하고 전리에 쉽게 다가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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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제자가 좌(左)에 기울어져 있다고 해 보자. 그러면 스승은 우(右)를 말한다. 그러면 제자는 좌에서 우로 의식을 옮겨간다. 그러면 양극단에 치우쳐져 있던 제자는 균형이 잡히고 나아가 중도(中道)로 다가가게 된다.


우 자체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바탕에 깔고 있는 우인 것이다. 비유하면 좌가 말라버린 우물이라면 우 역시 또 다른 우물이지만 그 우물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그 지하수는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다가 없는, 즉 진리를 체득하지 못한 사람이 우를 말해봐야 그것은 좌에 상대하는 우일 뿐이므로 그것 역시 말라버린 우물이므로 또 하나의 거짓이 된다.


그리고 나아가서 저 뒤에 보듯이 내 말을 뗏목으로 여기고 강을 건넌 다음에는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위대한 대자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진리가 되는 것이다. 말하는 내용과 관계없이 상대방 존재 그 자체를 중도의 바다로 빠뜨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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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 학인(學人)들은 진리에 대한 관념에 가득 차 있어 방편을 말하면 무시하고 거창한 진리의 법문을 들려 달라고 한다. 공부하고 있는 자기 에고(ego)를 만족시켜줄 법문 말이다. 방편을 받아 들여 자기 존재의 치우친 의식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근기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면서 선지식을 무시하고 도를 닦고 수행한다고 하니 만년설에 오르면 태양을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다. 눈꼭대기에서 모두 얼어죽고 굶어죽고 만다.


진짜 스승의 참된 법문은 진리 그 자체를 설하든 방편을 설하든 간에 한쪽으로 치우쳐져 중도에 벗어나 있는 제자의 존재 자체를 똑바로 세우고 나아가 깨뜨려 주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의 법문은 이와 같다. 타고난 맹인에게 태양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볼 수 있는 눈 그 자체를 뜨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모든 방편을 동원한다. 진리를 벗어난 방편은 눈을 뜨게 해주려다 눈을 완전히 망쳐놓고 좋은 방편으로 눈을 뜨게할 가능성조차 사라지게 해버린다.


그래서 선지식의 법문은 상대방에 따라 정반대의 말도 나오게 되는 것으로 고정된 법문이 없다. 그래서 때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많은 구슬이 아름다운 실에 하나로 쫙 꿰어 있어 다양한 빛을 발한다. 상대에 따라 맞는 각각 다른 구슬 하나씩을 내보여 주는 것이다. 진리를 한 두가지 두루뭉술하게 말하면서 계속 반복하여 세뇌하는 가짜 스승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현대인의 근기에 맞는 어리석은 스승들이 대접받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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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선사의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각자의 질문에 정반대로 대답한 이유이다.


너희는 지금 살펴 잘 들으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석가모니 재세시에는 그래도 상근기자들이 많이 있어 부처도 많이 탄생하고 아주 고차원의 법문도 가능하였다. 예수님도 서양에서 이런 상근기자들이 있었으면 석가모니불과 똑같은 차원의 법문을 해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쉽게 자세하게 자상하게 법문을 해도 언어가 가진 한계와 사람들의 고정된 의식이나 사고방식 때문에 자칫 보석이 쓰레기통에 들어가 빛을 잃고 악취만 풍기기 쉬운 법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앞의 해설에서도 부분적으로 썼지만 중생심이나 기존의 자기 사고방식을 옆으로 좀 제쳐두고 석가모니불의 가르침 관점과 안목에서 바라보라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고 자기 생각은 제쳐두고 듣는 것은 잘 듣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의 이런 말씀에 수보리 존자가 오직 그러한 마음 뿐이라고 법문을 청한다.


법문을 들어서 복덕을 쌓겠다거나 돈을 벌겠다거나 부처가 되겠다거나 지혜로와지겠다거나 자랑하겠다거나 하는 등의 일체 마음이 없어 지금 여기에서 오직 석가모니불과 그 말씀과 함께할 뿐이라는 것이다.


법문을 들어서 내가 어떻게 된다? 이것 자체가 중생심이다. 이런 중생심으로는 법문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 그냥 법문을 듣는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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