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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녹는점

by 백수광부

[소설 : 핸섬 가이즈]

22. 녹는점


세종은 성큼성큼 정우와 지우가 붙어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나랑 얘기 좀 해요.”

“그럽시다.”


정우가 세종과 얘기하기 위해 일어섰다.


“아니, 당신 말고 당신.”


세종은 정우가 아닌 지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머쓱해진 정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였어?”

“그러자.”


지우는 세종을 따라나섰다. 호프집 1층 주차장으로 갔다.


“겨우 저 정도 남자 좋아했어요?”

“뭐?”


“생각보다 눈이 낮으시네.”

“무슨 소리야?”


“나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 개집이나 만들고.”

“알아듣게 얘기해.”


“내가 당신 좋아하는 거 몰랐어요?”

“···.”


“내가 저 남자보다 못한 게 뭐냐고!”

“혹시 나랑 정우랑 사귄다고 생각한 거야?”


“그럼 뭔데! 왜 부둥켜안고 붙어 앉아서 웃고 있는데!”


세종은 반말에 소리까지 지르며 아주 흥분한 상태였다.


온종일 지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준커와 정남이 집을 그리고 지워댔다. 손가락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반복했다. 자신을 얼려버렸다 녹여버렸다 하는 그녀가 미치게 좋지만, 통제 안 되고 날뛰는 감정은 자신을 너무 힘들게 했다.


“나 그만 괴롭혀! 제발.”


세종은 그녀를 향한 미움의 눈물을 보였다. 온 진심을 눈물에 담아내는 어린 남자를 보며 지우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지우는 호프집으로 올라가 가방을 챙겨 내려왔다. 그리고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너랑 갈 곳이 있어.”


세종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올라탔다. 지우는 대학가를 빠져나와 사람 없는 오솔길 쪽으로 달렸다. 바람에 세종의 눈물도 서서히 날아갔다.


오토바이는 큰 벚나무 아래 벤치 앞에 섰다.


“여기 앉자.”


둘은 나란히 앉았다. 바람을 쐬고 오면서 세종은 마음이 많이 진정된 상태였다.


“내가 힘들 때마다 오는 곳이야.”

“···.”


“바람이 살랑거리면 숨이 쉬어져.”

“···.


“나 매일 떠올리는 사람 따로 있어.”


세종의 진정된 마음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군데요?”

“그 사람 유명한 뮤지컬 배우야.”


“흠.”


세종은 한참을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지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뮤지컬 학원에서 보고 첫눈에 반했지. 소년의 미소와 몰입할 때 나오는 그 눈빛이 좋았어. 그가 노래와 연기를 할 때면 나는 미지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어. 그는 검정 실크 셔츠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였어.”


지우는 그 남자를 떠올리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무대 위에서 환하게 웃으면 나도 웃었고, 그가 슬픈 연기를 하면 나도 마음이 찢어졌어.”

“···.”


“2년 이상을 만났는데 데뷔 후에 날 떠났어.”

“근데 여태 기다려요?”


“글쎄. 기다리진 않아. 쉽게 잊히지 않을 뿐.”

“그게 좋아하는 건가?”


“뚫린 구멍을 아직 메꾸지 못했어.”

“다른 사랑으로 메꾸면 되잖아요.”


“훗. 너는 그게 되니? 이 사람 때문에 뚫린 구멍이 저 사람 만난다고 메워지나? 잠시 덮어버리는 거 아닌가?”

“슬픔은 기쁨으로 덮으면 되는 거 아닌가?”


“넌 매사 쉽네.”

“쉽다고 진정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지.”


세종은 지우의 말에 그녀를 향한 그동안의 시간을 떠올렸다. 그리곤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당신이 날 끌어당겼어. 알 수 없는 위력으로 강하게. 당신 찾아 한참을 헤맸어. 당신이 오토바이 타고 가는 모습을 보고 무작정 달려갔어.


Bar에서 봤을 때 나는 심장이 내려앉았어. 처음으로 술이란 걸 마셨고 취했고 취한 내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야. 실수가 아니었어. 당신이 끌어당긴 거야. 당신도 밀치지 않았잖아. 나한테 화내지 않았잖아.


연락 없는 당신을 찾아갔고 어디에서도 당신 찾기 힘들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그래서 군대로 도망갔어. 근데 아무리 힘든 훈련을 받아도 밤이면 생각이 나서 미칠 것만 같았어. 나 때문에 미치겠다는 여자가 있어도 당신 자리 남겨두었어. 군대 있는 내내 생각했어. 그러다 미안한 마음에 나 좋다는 애를 만나려 했어. 그럼 당신도 잊히고 나도 안정될 줄 알았어. 근데 다시 당신이 나타나 날 흔들어놨어. 그런 당신을 향해 나는 또 달렸어. 왜 달리는지도 모른 채 그냥 끌려간 거야.


당신을 다시 만났고 알고 싶었어. 당신의 모든 것이 궁금했어. 당신이 날 보고 웃어줄 것 같아서 당신이 말한 개집을 생각하고 있었어. 온종일 그 생각만 했어. 당신 기쁘게 해주려고.


이런 내가 단지 즉흥적이고 감정적이기만 한 건가?”


지우는 세종의 진심을 듣고 사뭇 진지해졌다. 지우도 그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지우는 감정이 메말라 버린 상태였다. 어떤 사랑의 씨앗도 발아하지 못할 마음 상태였다.


지우는 세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맑고 깊은 눈에 빠져들어 가보았다. 그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눈을 감고 앵두 같은 입술을 갖다 대었다. 단 1초. 입술을 떼면서 세종에게 말했다.


“나는 아무 느낌이 없어.”

“지금 뭐 하는 거야!”


세종은 그녀의 행동에 화를 내었다.


“난 지금 그래. 웃을 순 있어도 사랑할 자신은 없어. 감정이 안 생겨. 말라버렸어. 모든 것이.”


세종은 지우를 쳐다보았다. 밉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밀쳐버리고도 싶고 안아주고도 싶었다. 한참을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망울에 맺혔을 눈물을 그려보았다.


_눈물이 줄줄 흐른다. 눈물샘이 마른다.

_그래서 잠시 멈춘다. 친구를 만나 웃는다.

_웃다가 뜬금없이 굵은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_휴지를 적시고 다시 웃는다.

_수업을 듣는다. 교수님의 말씀에 눈물이 흐른다.

_교수님과 눈이 마주친다. 교수님도 눈을 피한다.

_그래서 계속 눈물이 흐른다.

_상처받은 강아지에게 마음이 간다. 눈물샘이 터져 버렸다.

_부둥켜안았더니 또 눈물이 줄줄 흐른다.

_강아지의 체온이 전해져 눈물이 멈춘다.


세종은 머릿속에 숱한 그녀의 눈물을 스케치해본 후 결심했다. 누나를 잃은 후 힘들어했던 자신의 모습을 지우에게서도 보았다. 그는 지우의 양어깨를 조심히 잡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냥 그 자리에 있어.”


지우가 묘한 세종의 말에 그를 응시했다.

“내가 갈게.”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에 지우의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세종은 자신의 얇은 재킷을 벗어 그녀 양어깨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았다. 아주 조심히, 포근하게,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자신의 열기가 그녀에게 전해지도록….


서서히 그녀의 몸에도 온기가 돌았다. 얼어버린 눈이 녹기 시작했다.

살얼음이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고체가 액체가 되었다.

또르르 한 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위로받는 느낌.

존중받는 느낌.

사랑받는 느낌.

녹아내리던 눈물은 훨훨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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