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핸섬 가이즈]
23. 사랑해도 불안해
세종의 하루가 바빠졌다. 멋진 남자가 되고 싶었다. 사랑을 줄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던 그녀가 언제든 찾아가면 만날 수 있다는 그 하나에도 사탕 문 아이처럼 배시시 웃음이 났다. 세종은 핸섬 가이즈 호프집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런 세종에게 정우가 물었다.
“여기는 술 마시는 곳이지 그림 그리는 곳 아닌데?”
“제가 개집 설계를 하는 중이라서요.”
“아니 개집을 며칠째 그려? 개 팔자가 상팔자네. 그까짓 것 대충 하나 지으면 되지.”
“그리 말씀하시면 준커와 정남이가 섭섭하죠.”
“걔네가 누군지. 여하튼 술 한 잔도 안 시키고 이리 오래 자리 차지하고 있으면 실례지.”
“지우 보러 왔어요.”
“지우야, 여기 사우나 오징어 한 마리.”
지우가 오동통한 오징어와 마요네즈 안주를 들고나왔다.
“추정우. 서열 정리 좀 하자. 휴학했어도 난 25살이고 너보다 누나야. 반말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피. 내가 사장인데 반말 좀 하면 안 되나?”
“추 사장, 누나가 싫으면 선배라고 불러.”
“쟤는 나 보다도 어린데 왜 이름 불러?”
“쟤는…. 쟤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
“아, 뭐야?”
일 년을 함께 생활한 정우가 지우의 태도에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그때 호프집으로 진한과 우빈이 들어왔다.
“엇.”
그들은 세종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정우가 그들을 한쪽으로 데려가 조용히 말했다.
“쟤 여기서 3시간째다. 술도 안 마시면서.”
“웬일?”
“지우 누나 좋아하는 것 같아. 계속 쳐다보면서 실실 웃어.”
“헐. 천하의 온세종이?”
다들 둘의 관계가 궁금해 세종의 옆 테이블로 몰려 앉았다. 사교성 좋은 우빈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랜만. 나처럼 군대 다녀왔나 봐.”
“그런가 봐.”
“군대는 역시 사람을 만들어. 그치? 대답도 다 하고.”
“훗.”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자.”
우빈의 말에 진한이 뭔가 생각난 듯 세종을 쳐다보며 열을 올렸다.
“나 기억하지? 1학년 때 고시원 앞에서 나랑 술 취한 지영이 두고 혼자 도망갔던 것도.”
“헛. 흠흠.”
세종도 갑자기 그 기억이 나서 헛기침을 했다.
“갑자기 말없이 줄행랑을 쳤다니까.”
그때 지우가 테이블 가까이 왔다.
“나빴네. 술 취한 여자를 버리고 가고.”
지우가 한마디 했다. 그러곤 세종 옆자리에 앉았다.
“누나, 왜 거기에 앉아? 둘이 무슨 사이라도 돼?”
우빈이 지우에게 섭섭한 투로 말했다. 세종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어 창가를 바라봤다.
“사이는 무슨. 세종이 개해빵 동아리 일 도와준대서. 여기 자주 올 거야.”
세종은 쑥스러움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잘 챙겨줘.”
세종은 어깨를 툭툭 치며 선을 긋는 그녀에게 괜한 서운함도 생겼다. 사귀는 것도, 아무것도 아닌 관계임에도 말이다.
“그냥 이참에 핸섬 가이즈 동아리도 가입하지? 정우 형이 예전부터 너한테 관심 있었는데.”
진한이 세종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래, 너도 핸섬 가이즈 활동하면 좋겠다.”
진한의 말에는 관심 없던 세종이 지우의 권유로 쉽게 핸섬 가이즈에 가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셋은 나이가 같지? 잘 지내보자.”
드디어 정우가 그리던 핸섬 가이즈 완전체가 되었다.
추 사장과 훈남들.
바늘에 실 꿰듯 지우가 가는 곳이면 세종이 졸졸 따라다녔다.
“실습 다 끝났지?”
“응. 온몸이 뻐근해.”
“저녁 먹자.”
“계속 반말로 까불 거야?”
“응.”
“못 말려. 나 바로 알바 가야잖아.”
지우는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오토바이에 올라 키를 꽂았다.
“어!”
세종이 그녀를 번쩍 들어 뒷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준비한 헬멧을 씌워주었다. 본인도 헬멧을 쓰고 앞 좌석에 앉았다.
“오늘은 나랑 놀아.”
“야! 나 일 해야 한다고.”
“못 간다고 미리 말해놨어.”
“뭐?”
세종은 속도를 높여 어디론가 달렸다. 지우는 갑자기 빨라진 속도에 휘청했고 세종의 옷을 더욱 세게 잡았다. ‘부앙’ 소리와 함께 더 속도를 높이던 세종이 그녀에게 말했다.
“지우야, 옷 늘어나.”
“뭐? 안 들려.”
“옷 늘어난다고!”
“뭐라고?”
세종은 속도를 조금 줄였다. 그리고 그녀의 한 손을 본인 허리에 가져왔다.
“안전하게 허리 잡으라고.”
“···.”
“양손으로 꽉 잡아. 속도 낼 거야.”
지우가 세종의 양쪽 허리를 어색하게 감싸 안았다.
“내 등에 기대.”
지우는 들렸지만 잠시 머뭇거렸다.
“밤공기가 차.”
지우는 그 따뜻한 말에 결국 세종의 등에 기댔다. 눈을 감았다. 지우는 세종의 몸에서 나는 향을 느껴보려 노력했다.
감정 표현도 학습해야 잘하는 거라면 배워서라도 그를 그로 잊어보고 싶었다.
20분쯤 달렸을까?
오토바이가 멈추고 지우도 눈을 떴다.
“여기야.”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 공유주방 대여 서비스를 하는 스튜디오였다. 세종이 지우의 손을 잡고 그녀를 안쪽으로 데려갔다.
“우와~ 파티룸이네.”
“근사한 요리 해주고 싶었어.”
세종은 지우를 식탁 앞에 앉혔다.
“나 요리하는 동안 쉬고 있어.”
“그래.”
지우는 세종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냥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자신을 위해 앞치마를 두르고 정성스럽게 무언가를 준비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이제 다 됐습니다.”
세종이 테이블 위에 함박스테이크 두 접시를 마주 놓았다. 순간 지우는 눈물이 핑 돌았다.
“우와 감동이야.”
과거의 남자가 생각나서 난 눈물이 눈앞의 남자로 인한 것이 되어버렸다. 사실 세종도 눈치챘는지만 모른 체했다.
“나 함박스테이크 아주 좋아해. 근데 오랫동안 못 먹었어.”
“나도 그래.”
“오늘 너랑 먹으면 잘 넘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우리 맛있게 먹자.”
지우도 예전 그와의 추억으로 목 넘김이 쉽지 않았고 세종도 친누나에 대한 기억으로 목이 메어왔다. 하지만 서로 애써 모른 체하며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둘은 과거의 상처에 연고를 고이 발랐다.
세종은 후식으로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작은 컵에 내어왔다. 둘은 나란히 식탁에 앉았다. 세종이 한 스푼 떠서 지우 입 앞에 내밀었다.
“부끄럽게 왜 이래. 스푼 하나 더 내어 와.”
“하나밖에 없어. 내가 다 치워버렸어.”
“칫.”
지우는 못 이기는 척 한 스푼 받아먹었다. 달콤한 체리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지우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그 행복한 모습을 보며 세종은 안심했다. 세종도 한 스푼 퍼서 입 안에 굴렸다.
지우가 피곤한지 식탁 위에 한쪽 팔을 베고 엎드렸다. 그러니 세종도 함께 그녀를 마주 보며 엎드렸다.
“어제 보고서 쓰느라 잠을 좀 설쳤더니 피곤하네.”
“나한테 전화하지.”
“그럼 해결책이 있어?”
“내가 해줄 수 있는데.”
“네가 동물해부학 숙제를 어떻게 해줘?”
“난 다 해줄 수 있지.”
지우가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세종이 그 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당신은 치아가 참 예뻐. 그렇게 날 보고 웃으면 난 기분이 참 좋아.”
지우가 세종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눈이 참 깊어. 그렇게 날 바라봐주면 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지우가 세종의 진심 가득한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곤 아련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하필 나였을까? 나 아니면 너는 더 반짝반짝했을 텐데···.”
“···.”
“누군가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을 텐데···.”
“···.”
지우의 말에 세종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5분 동안 그의 눈 근육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우가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가 촉촉해진 두 눈을 서서히 뜨면서 말했다.
“그 빨간 입술로 나 사랑한다고 말해줘. 그래 줘. 부탁이야.”
“···.”
“나 불안해. 눈 뜨면 당신 내 앞에 없을까 봐.”
지우는 그 작고 어린 청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볼에 손을 올려 감싸며 주문을 외웠다.
“사랑해볼게.”
“사랑해줄게.”
“그러니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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