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핸섬 가이즈]
24. 끝도 시작도 힘든, 사랑
6월 말, 햇살이 제법 뜨거웠다. 그늘이 드리운 잔디밭에는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수업을 마친 세종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수의학과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개해빵 동아리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한 남자가 있었다. 검정 실크 셔츠에 양복바지를 입은 뒤태를 보는 순간 세종은 직감했다.
‘저 남자구나.’
지우의 옛 남자, 뮤지컬 배우 그였다. 둘의 대화가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
“여긴 어쩐 일이야?”
“은사님이 대국대 교수로 오시게 되었어.”
“그렇구나.”
유리 창문 너머로 지우를 보던 세종은 그녀가 평소 같지 않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여전하네.”
“뭐?”
"안 괜찮으면서 괜찮은 척하는 거."
“···.”
“우리 자주 갔던 커피숍도, 경양식집도 그대로더라.”
“응.”
“그 집 함박스테이크 정말 맛이 있었는데···.”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데?”
그는 간절한 표정으로 지우에게 다가갔다.
“나 그리워.”
“···.”
“너도. 그때도.”
“다 지난 일이야.”
“아니,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이러지 마.”
“우리 다시 사랑하자.”
세종은 먼발치였지만 지우의 미세한 흔들림을 감지했다. 세종은 그녀가 아니라고 더 강하게 말해주길 바랐다.
“더는 나 흔들지 마.”
“내가 잘할게.”
“넌 날 떠났어.”
“그땐 어렸잖아.”
“그것도 두 번이나. 너밖에 몰랐던 나에게 잔인하게도 넌 그랬어.”
“난 그때 너무 어렸어. 미지의 세계에 파랑새가 있는 줄 알았어.”
“나를 데려갈 순 없었어?”
“그땐 용기가 없었어.”
“네 앞에서 항상 힘이 없던 나와 함께 할 순 없었냐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제대로 사과해. 그때 잘못했었다고.”
“후회했어. 매일.”
“마음을 다해 사과해.”
“너 없는 날들이 나에게도 지옥이었어.”
“안 믿어. 안 믿을 거야.”
그와 얘기하던 지우가 밖으로 나오려는 모습에 세종도 급히 몸을 숨겼다. 지우는 밖으로 나와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뒤이어 그도 지우를 따라 나왔다.
가볍길 바랐던 그의 얼굴에서 세종은 진심을 보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지우가 그에게 가버릴까 봐. 아니 또 숨어버릴까 봐. 그게 사실 더 두려웠다.
그날 이후, 지우는 세종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간간이 문자로 바쁘다는 말만 할 뿐 피해 다녔다.
세종은 유기견센터에 찾아갔다. 준커와 정남이가 세종이 만들어 준 근사한 집에서 나와 꼬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지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세종은 곧바로 정우네 호프집을 찾아갔다. 지우는 역시 보이지 않았다.
“컴 온, 세종.”
“지우 여기 없어?”
“얘 모르나 본데?”
우빈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진한을 쳐다보았다.
“뭘?”
“알바 그만뒀어. 기말고사 끝나는 대로 동물 의료봉사 떠난대.”
“어디로?”
“몽골.”
“지우 지금 어딨어?”
정우가 끼어들어 말했다.
“이따 잠시 들르기로 했어.”
세종은 초조하게 그 시간을 인내하고 있었다.
“누나!”
핸섬 가이즈 애들이 그녀를 불렀다.
세종은 지우를 보자마자 손목을 잡고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핸섬 가이즈 애들은 의아해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이 뭐야? 아무래도 수상해.”
정우의 말에 우빈이 말했다.
“형은 지우 누나 좋아해? 엄청 신경 쓰이나 봐.”
“뭔 소리. 우리 학교에서 지우 안 좋아하는 애도 있어?”
옆에 있던 진한이 끼어들었다.
“난 민영이만 좋은데?”
“우웩.”
우빈이 장수 커플인 진한을 놀렸다.
“근데 너희 둘은 결혼은 언제 할 거야?”
“결혼? 23살이 무슨 결혼 타령이야?”
“야. 너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하면 타지로 가잖아. 결혼할 거면 졸업 후 바로 해.”
우빈이 어른처럼 진한에게 조언했다.
“난 빨리 결혼할 생각 없는데? 책임감만 늘어나.”
“그러다 고무신 벗어버리고 바로 하이힐 신으면?”
“민영이는 안 그래. 너나 걱정하세요.”
“난 프리 스타일.”
“더 나이 들면 하늘을 찌르던 너의 인기도 사라져.”
“그럼 정우형이랑 계속 놀면 되지.”
“에헤이!”
우빈도 많이 외롭던 찰나여서 진한의 말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우빈아, 내가 민영이 통해서 소개팅 하나 진행할 테니 한 번 하자.”
“굳이? 됐수다.”
“진행 시킨다. 그런 줄 알아. 너 점점 이상해져 가.”
주차장까지 끌려간 지우가 세종의 손을 뿌리쳤다.
“왜 이래? 아파.”
“또 도망가?”
“뭘?”
“왜 또 그 남자 피해 숨는 거냐고!”
지우는 세종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무슨 소리야? 그냥 동아리 봉사 가는 거야.”
“이 타이밍에 갑자기?”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어.”
“당신 참, 사람 질리게 해.”
“뭐?”
세종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그녀 탓을 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말이었다.
세종의 말에 지우는 뒤돌아서 가려 했다. 그런 지우를 세종이 붙잡았다.
“가지 마.”
“이거 놔.”
“제발 가지 마.”
“너야말로 그만해. 너 아니어도 나 힘들어.”
“나도 같이 가.”
“제발.”
지우는 세종의 팔을 뿌리치고 호프집으로 올라갔다. 핸섬 가이즈 애들과 인사를 나눴다.
“개가 해방되는 그 날까지, 빵빵하게 지원하고 오겠습니다. 단결!”
그렇게 애써 웃으며 주차장으로 갔다. 세종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는 차분히 하고 싶었는데 그리 둘은 시작도 못 하고 헤어졌다.
끝도 시작도 힘든,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