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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Sep 28. 2024

#19. 무제(無題)

*소설입니다.



 HH와의 이야기 
 #5. 너와 그녀가 헤어진 이유


그날은 내 친구이자 너의 여자친구인 하연이 생일이었어. 하연이의 부탁으로 내 징검다리가 되어 너희 둘이 사귀게 된 거라 생일이나 기념일에 나도 늘 초대받았지.


감기에 걸린 탓에 목이 칼칼했지만 생일 파티 장소인 호프집으로 갔어. 거기에는 여러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인 하연이와 네가 있었지. 나는 너희들 맞은편에 앉았어.


다정한 너희 커플을 보고 있자니 자꾸 목이 말랐어. 따끔거림을 참고 차가운 맥주를 연거푸 마셨어. 그래서인지 잔기침이 계속 났지. '흠흠'거리며 가래 긁는 소리가 미안해서 정수기로 가서 따뜻한 물을 컵에 담아왔어. 친구들이 따라주는 맥주를 한잔 마시고 따뜻한 물 한잔 마시고를 반복했지.


나의 기침소리가 내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지. 좋지 않은 몸 상태와 알 수 없는 처지는 기분에 집에 가고 싶어졌어. 하연이에게는 사정을 말하고 으로 돌아왔지. 자려고 누웠는데 문자가 왔어. 너였어.


“집 앞이야. 잠깐 나와.”

“나 자려고 누웠는데.”


“잠깐이면 돼.”



나는 힘든 몸을 이끌고 집 앞으로 나갔어. 너는 내 허락도 없이 내 몸에 손을 댔어. 내 이마에 손을 얹던 너는 다소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어.


"이럴 줄 알았어."

"왜 만져!"


"너 열 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무언가에 신경질이 나서 예민하게 굴었어.


"아프면 들어가서 쉬지. 차가운 맥주는 왜 계속 마셔?"

"너 지금 조금 오버하는 거 알아?"


너는 내 말에 답은 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구겨진 약봉지를 건넸어. 종합감기약이었어.


“굳이 이거 주려고 온 거야?


너는 이번에도 별 말이 없었어. 나는 하연이가 이 상황을 알면 안 되겠다 싶었지.


"얼른 돌아가. 오해하겠다."


“내가 알아서 해.”


너는 사춘기 아이처럼 그 말을 남기고 돌아갔어.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너희 둘은 헤어졌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어. 하지만, 뭔가 내 영향도 있는 것 같은 찝찝함에 우리 셋은 모두 어색해졌어.   





시간은 잘도 흘렀다. 2023년도 캘린더가 시중에 제법 나왔다. 글쓰기에 취미가 생긴 이후로 책과도 많이 친해졌다. 거실 책장을 훑어보다가 서준이 방 책장까지 가보게 되었다. 누리끼리해진 세계 문학전집들 사이에 끼워져 있던 핑크색 책이 눈에 들어왔다. 서준이가 쓴 책이었다. 보는 도중에 서준이에게 빼앗겨 끝까지 보지 못한 그 책을 다시 펼쳤다.   


#mmj

우리 부모님은 민민커플이었다. 아버지는 김민우, 어머니는 백수민. 둘은 직장 동료의 소개로 만났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똑 부러지는 척하지만 실수 투성이인 면이 매력 있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책임강 강하고 남자다운 모습이 좋았다고 하셨다. 연애하던 시절 두 분의 사진을 보면 아직도 기분이 참 좋아진다.

어머니는 8개의 치아가 다 보이도록 환하게 웃고 계셨다.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는 우리 어머니의 매력 포인트인데 요즘 보기 힘들어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 역시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어머니 어깨를 감싸고 계셨는데 이제 볼 수 없어 마음이 아프다. 사진 속 두 분은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이다. 그 사랑을 한 몸에 받고 태어난 사람이 나, 김서준이다.

아버지는 나의 소지품들에 항상 mmj라고 표기하셨다. 민(m)과 민(m)이 만나 태어난 준(j)이라는 뜻이었다. 소문자 j가 mm의 왼쪽 아래쪽으로 내려오다 다시 올라가는 포물선을 그리면 웃는 모습이 된다. 아버지는 우리 셋이 모여서 행복한 하나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가슴이 먹먹했다. 고인이 된 남편, 민우 씨는 내가 많이 사랑한 남자였다. 그래서 이혼을 결심할 당시 많이 미웠다. 나를 배신한 그 마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받을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붙잡기는커녕 아이러니하게도 서둘러 이혼을 말했다. 버림받기 전에  버려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로지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시간을 달라고 하는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다른 여자들이 한 번은 속아 넘어가주는 그런 시늉도 없었다.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 부분이 지금은 조금 후회가 된다. 이젠 어떤 변명도 들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는 게 문득문득 아렸다.


아직 내 마음에 그를 향한 사랑이 남아있는 걸까? 아니면 나를 향한 나의 연민인 걸까? 남편의 마지막이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고 포장하고 싶은 걸까? 그러면 버림받은 내가 덜 후져 보이는 걸까? 덜 미련해 보이는 걸까? 이런저런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모니터 앞에 앉았다. 키보드를 치는 내 손이 애처로워 보였다. 굵어진 뼈마디, 주름이 지고 거칠어진 내 손가락을 보다가 문득 생활용품 할인점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파스텔 톤의 핑크와 바이올렛 컬러의 매니큐어를 샀다. 떨리는 손으로 세심하게 매니큐어를 발랐다. 딱 15년 만의 손놀림이라 많이 서툴렀다. 서준이 나이만큼 나는 내가 아닌 서준 엄마로 살고 있었다.


‘나에게도 말랑말랑하던 젊은 날이 있었는데.’




산미가 강한 원두를 갈아 커피를 추출했다. 어느덧, 나는 신맛도 쓴맛도 즐길 줄 아는 40대였다. 매니큐어가 마르는 사이, 오랜만에 여유로웠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휴대폰 SNS 속 친구들의 삶을 구경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즐겼고 누군가는 인정을 받았고 누군가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스쳐가는 그들 속에서 얼마 전에 저장한 '이환한'의 프로필에서 손놀림이 멈췄다.


'밤하늘의 별 사진과 배경음악은 가수 G의 '무제(無題)’' 


나 역시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그 음색을 좋아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무제(無題)'.

 

도대체 너는 과거에 어떤 사연이 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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