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 입에서 나간다는 소리는 그 정도였다. 젊은 날의 나를 잊지 않고, 그때 내 취향에 맞는 커피를 사 온 그에게 그 말이 나가고 말았다.
"변했네. 그럼 아메리카노로 다시 사 올까?"
"아니야. 커피의 쓴맛은 인생의 쓴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지."
도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이상한 소리만 하고 있었다. 당황했다는 반증이었다.
"이 시간에 여기는 어쩐 일이야?"
환한이가 물었다.
"그냥 바람 쐬러. 너는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야?"
"난 부동산에 볼 일이 좀 있어서."
"아~ 그동안 잘 지냈지?"
“영국에서 살다가 작년에 한국왔어.”
“진짜?”
"너는 애가 중학생인가?"
"응. 세월 참 빠르지?"
"그러게."
"너는?"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긴장하며 물어봤다.
"셋이 갔다 혼자 돌아왔네."
"아..."
'그럼 그 여자는 뭐야? 재혼?'
뭔가 상황이 복잡하고 뒤죽박죽 정리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내가 뭔가 착각인지 오해인지를 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 같은 사람을 돌싱이라고 하던데..."
"아..."
내가 끼워 맞춘 퍼즐은 잘못된 퍼즐 조각이었나?
"의뢰인이 이 근처에 집을 짓는다고 해서 오늘 사무실알아보려고 온 거야."
“아~ 그렇구나.”
“내 말만 계속하네.”
“아냐. 괜찮아.”
“근데 여기서 너를 보다니 신기하네.”
나 역시 신기할 따름이었다.
'BMW 딥블루 미니 쿠페를 타고 킵스텍에 근무하는, 아내 불륜사실을 모르는 군의동 H아파트에서 사는 그 남자는 네가 아니었구나.'
추리에 실패한 나는 허탈한 느낌이었지만 한결 편안한 느낌이었다.
내가 본 건 정말 네가 아니었을까?'
나는 지는 해를 보면서 끊임없이 그와 많은 얘기를 했다. 예전의 추억부터 지금까지 긴장할 필요도 없고 대화가 끊겨도 신경 쓰이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집중했다. 연락하지 않은 공백기 동안 그의 삶을 따라가 보려 노력했다. 삶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매너, 살아온 인생의 굴곡, 지금 그의 관심사들이 천천히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반듯한 삶이었다.
“난 아직 철이 없는데, 넌 참성숙해졌네.”
“너한테 그런 말을 다 듣고. 영광이네.”
“그래? 예전부터 빈말은 안 했어.”
“그렇긴 하지.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탈이었지."
“에잇! 그랬나? 예전의 솔직하고 화끈했던 백수민은 이미 죽었다네."
"후. 여전한데?"
“근데 넌 나에 대해 왜 안 물어?”
뭔가 오랜 친구의 이야기를 다 들었는데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반칙 같았다. 그래서 묻지도 않는 그에게 왜 묻지 않냐고 물었다.
“사실 영국 있을 때 소식 들었어.”
남편이 죽었을 때 장례식을 찾은 친구들로부터 소식은 들은 모양이었다. 목이 타서 빈 맥주 캔에서 남은 한두 방울까지 탈탈 털어 입에 넣었다.
5분여간 정적이 흘렀다. 내 마음속 깊은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좀 걸을까?”
우리는 어둑해진 모래사장 위를 걸었다. 두 뼘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여름밤 바닷바람을음미하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함께 걷는 그 자체만으로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그는 늘 나에게 그랬다.
“일은 재미있어?”
“할 때는 고생스럽긴 해도 완공되고 나면 뿌듯하지.”
“이번 집은 어떤 집인데?”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선물이래.”
“우와, 바닷가에 짓는 집이라니 더 로맨틱하다.”
그때였다. 모래사장에서 어떤 아이가 찬 공이 내게 날아들었다.
“악!“
공은 나의 팔에 맞았고 그때 난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안전한 곳으로.
“괜찮아?”
내가 눈을 떴을 때 그의 팔은 나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내 시선은 그의 어깨에 머물러 있었다.
“어, 괜찮아.”
나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민망한 이 상황은 정리가 되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