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일 때 환한이 과친구들 모임에 껴서 이 바닷가로 놀러 왔던 기억이 났다. 진실게임을 하며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한참 동민이란 아이와 말이 잘 통해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볼일을 보러 밖으로 나왔는데 환한이가 따라 나왔다.그는 다짜고짜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만 좀 마셔.”
“에이~ 이 정도로 안 취해.”
“준다고 다 먹지 말고.”
“억지로 먹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마시는 건데 왜 그래?”
“너 취하면 내가 피곤해지니까 그렇지.”
본인이 귀찮아져서 그런다는 말에 기분이 나빴다.
“신경 안 쓰면 되잖아!”
“신경 쓰이게 하잖아!”
“아~ 잔소리 좀 그만해.”
“후~ 똥고집 좀 그만 부려.”
“니가 내 남자친구라도 돼?”
"그랬으면 벌써 갖다 버렸지."
"너 자꾸 까불래?"
"넌 자꾸 덤빌래?"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나는 급하게 달려오는 어떤 사람과 부딪혔다. 휘청거리던 나를 그가 잡아끌었다.어느새 나는 그의품 속에 파묻혔다. 그의 향은 세숫비누향. 꾸밈없었고 포근했다.
20대의 그 일이 40대인 지금 데자뷰처럼 일어났다. 그때와 다른 건 내 마음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가 나를 감싸는 순간 위태로웠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그때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참으로 나약해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단해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과거의 상처는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나에게 마음을 내준다면 다시 눈물을 쏟을만큼 참고 있었다.
언제쯤이면 이런 슬픔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 빛이 사라져 가는심해로가라앉으며 한참을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수민아, 우리 다시 예전처럼 지낼까?”
그가 엷은 미소를 보이며 내게 말했다. 차마 답변하지 못했다.20대의 나와 지금의 나는 상황이 달랐다. 20대의 나는 자신감이 넘쳤다. 마음먹으면 먹은 대로 내 감정을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 자신을 믿지 못했다. 스치는 바람에도 이성의 끈을 놓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마 쉽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글쎄. 가능할까?”
나의 대답에 그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누가 시비 걸면 연락해.네 편 해줄게."
'제발 내 편이 되어주었으면...'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냉정을 찾아야 했다.
"누가 대한민국 40대 아줌마를 건드려?"
"그런가?"
"아! 사춘기 애들 빼고."
"근데 걔네들은 나도 무서워. 하하."
환한이의 말에 나는 오랜만에 웃었다. 한 남자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 오랜 친구에게 의지하고픈 마음을 얼른 주워 담고는 더욱 해맑게 웃어 보였다. 언제일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며 우리는 그날 밤 해변에서 헤어졌다.
어느덧 은행잎이 사뿐히 내려앉는 가을이 되었다. 싱숭생숭해져서 수진이를 불렀다. 벤치에 앉아 가을볕을 만끽했다.
“언니, 피부가 왜 그래?”
수진이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한마디 했다.
“왜? 칙칙해?”
“신경 좀 써. 나이 들수록 피부가 탱탱해야 예뻐 보여.”
“이 나이에 뭘 예뻐 보일 것까지.”
“40대면 아직 청춘이야. 나중에 후회 말고 관리 좀 해. 다들 얼마나 열심히 관리하는데.”
“다들 외모 말고 내면부터 채우라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에 와서 화장대에 급히 앉았다. 눈, 코, 입,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
이 시는 나에게는 안 통했다. 자세히 볼수록 미운 점만 보이고 오래 볼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짊어진 무게만큼 처져버린 나의 피부가 애처로웠다. 주름마저 사랑스러운 40대를 바랐는데 이미 늦어버린 모습에 속이 상했다.
돌보지 않고 방치한 내 몸에게 미안함이 일었다.수진이의 말에 신경이 쓰여 찬물로 점심 세수를 했다. 오랜만에 거울 앞에 앉아서 스킨, 에센스, 영양 크림을 톡톡 두들겨가며 흡수시켰다. 그래도 내 마음 받아주는 피부가 고맙고 숨을 쉬는 피부 덕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수진이가 주방에서 샐러드를 만들어 내어 왔다.
“언니, 오늘 점심부터 채식하자. 살도 좀 빼고.”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그냥. 친구들 SNS 보면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뭐 하고 있나 싶고."
나는 조용히 양상추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 껍데기인 거 알잖아."
“알지. 근데 가끔은 그런 것이 부러워."
수진이의 말에 나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맞아. 가끔은 크고 화려한 껍데기라도 뒤집어쓰고 있어야 마음이 편할 때가 있지."
우리 자매는 샐러드에서 호두와 아몬드 등 견과류를 골라 먹으면서 넋두리를 했다.
“몇 달 전에 우연히 대학시절 친구를 봤는데 부럽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
"그 친구는 뭔가 일에도 집중하고 외모도 그대로던데 나는 아닌 것 같고."
환한이를 만났을 때 움츠러들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수진이에게 얘기했다.
"누군데? 나 언니 친구들 거의 다 알잖아.”
“있어. 너는 잘 모르는 애.”
수진이는 환한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근데, 환한이 오빠는 잘 지내?"
"어? 아마."
"예전에 나한테 엄청 잘해줬는데."
"그랬나?"
"내 생일날 케이크도 언니 통해서 보내주고 했잖아. 디자인 문구류도 사주고."
"걔가 세심하게잘 챙기는 스타일이었지."
"내가 그 오빠 멋있다고 했더니 언니가 뭐라고 한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언니 혹시 그 오빠 좋아했어?"
"또 쓸데없는 소리."
수진이가 집으로 돌아간 이후, 나는 노트북을 켰다. 또다시 환한이를 떠올리며 글을 써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