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또 환한이를 생각하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바다가 그려졌고 그 바닷바람에 내 손가락이 춤을 추듯 글을 써 내려갔다.
HH와의 이야기 #6. 우리 둘의 겨울 여행
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남자친구와 헤어졌어. 한 달간의 짧은 만남이었고 이른 이별이었지.
나와 그의 친구들의 미팅날,그는 대타로 나왔어. 나에게 호감을 표했고 미팅이 끝난 후 집까지 바래다주었어. 아이돌 같은 외모에 매너까지 좋아서 나도 그가 마음에 들었어. 우린 그날부터 1일이 되었어.
그는 집이 가난하다고 했어. 주말마다 지방에 있는 친척 집에 가서 돈을 벌어 와야 하는 대학생이었어. 모성애를 자극하는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었지. 그러다 어느 날, 데이트 비용도 부담이라며 가난해서 미안하다며 내게 이별을 통보했지. 둘이 만날 땐 라면만 먹었는데도 말이야.
말도 안 되는 그 거짓말에 나는 잘도 속아 넘어갔어. 가난 때문에 이별한 거라며 눈물까지 찔끔거리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는 양다리였어. 2년을 사귄 연상의 애인이 저 멀리 땅끝마을에 있었던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한 달간 가난한 집 막내아들 코스프레에 잘도 속아 넘어갔지.아주 멍청했지. 속았다는 사실에 속이 쓰릴 때쯤 난 너를 불렀어.
“바빠?”
“아니. 왜?”
“바다 가자.”
너는 이유를 묻지도 않았어. 차를 구해서 집 앞으로 왔어.
“백수! 오늘 기분 왜 이래?”
“사기당했거든.”
너는 짐작했는지 더는 묻지 않았어.
“어디로 모실까요? 멋있어 동해? 만만해 서해? 못 가요 남해?”
“참나. 넌 뭐가 그리 기분이 좋아? 친구가 사기당했다는데."
"사기당한 걸 빨리 깨달았음 됐지 뭐."
"쳇! ‘만만해’ 콜?”
12월 24일이라 라디오에서 캐럴이 하루 종일 나와서 꿀꿀하지 않았어. 거리상 만만한 서해로 가장 만만한 너와 떠나는 여행은 춥지 않았어. 난 네가 데려가는 곳이면 언제나 마음이 놓였어.
“와! 바다다!”
차를 대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마구 뛰었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어.남자에게 놀아난 것 같아 한심했는데 탁 트인 바다를 보니 미련했던 나와 결별할 수 있을 것 같았지.
‘별 일 아니야. 발에 묻은 모래처럼 금방 털어낼 거야.’
꼭 안고 걸어 다니는 연인들을 배경 삼아 우리는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았어. 그리곤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어.
어느새 나는 기분이 좋아졌어. 바닷가의 예쁜 커플들이 사랑을 나누는 사이 우리 둘은 우정을 나눴어. 강아지처럼 폴짝 팔짝 뛰어다니면서 말이야. 사랑 앞에선 배고픔도 잊지만 우정 앞에선 배고픔은 그냥 고픔이었어.
“사발면에 캔 맥주 어때?”
너의 말에 나의 눈빛은 반짝였지. 늘 먹는 것 앞에서 의견이 일치했어. 눈 내리는 겨울 바다를 보면서 편의점 테라스에서 사발면을 먹는 건 너무 낭만적이었어. 입가심으로 캔 맥주를 권하는 너란 친구는 멋을 아는 친구였어. 뜨끈한 국물에 노곤한 기분까지 최고였어.
“이제 뭐 하지?”
너의 말에 나는 뜬금없는 제안을 했어.
"나랑 같이 미용실 가 줄 수 있어?”
“미용실? 뭐 하게?”
“머리자르려고.”
“헉. 헤어진 티를 꼭 내고 싶어?”
“어! 내고 싶어. 그냥 확 잘라 버릴 거야.”
우리 둘은 대부도의 한 미용실로 향했어. 커트 머리로 잘라달라는 내 말에 미용사는 잡지를 펼쳐 주었어. 나는 망설임 없이앞 머리가 긴 커트머리를 한 남자 모델을 가리키며 이대로 잘라달라고 했어. 미용사와 너는 말렸지만 나는 고집을 피웠지. 결국미용사는 커트를 시작했고 너는 잠시 밖으로 나갔지.
커트가 마무리될 즈음 너는 검은 봉지 하나를 들고 돌아왔어. 드라이가 끝나고도 어색한 머리를 보며 나는거울 앞에서 후회 중이었어.
“괜히 잘랐나 봐. 이상하지?"
“나름 괜찮아."
"괜한 위로는 말고."
“아닌데. 순정만화에 나오는 미소년 같아.”
"진짜지?"
너의 말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어. 그때 너는 나에게 검은 봉지를 내밀었지.
“실연당한친구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네가 건넨 건 솔방울이 달린 빨간색 겨울모자였어. 나는 거울 앞에서 그 모자를 썼지.
"뭐야~ 너무 귀엽잖아.”
"은근 내가 빨간색이 잘 받네."
거울 앞에서 흡족해하는 커트머리 미소년이 귀여웠나 봐. 너는 빨간 모자를 쓴 내 머리를 왔다 갔다 쓰다듬었지. 이겨내라는 위로의 말이었을 거야. 강아지 머리 만지듯 하는 너의 손놀림에 잠깐이지만 설렜어.
'너는 나에게 슬플 때면 찾고 싶은 바다였어.'
오늘도 블로그에 글을 썼다. 저장하고 노트북을 껐다. 옆에 있던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벌써 7시 30분이었다.
"앗! 오늘 대목인데."
급하게 배달앱을 켰다. 크리스마스이브라 배경 화면은 빨간색 포인세티아에, 산타할아버지와 루돌프가 요란을 떨었다.
'어떡해... 벌써 콜사야.'
한참 저녁 피크타임이었는데 콜이 없었다. 차가 막히는 크리스마스라 오토바이 라이더들에게 집중적으로 콜을 주는 것도 같았다. 아파트 문 밖 오토바이들은 배달하느라 아주 바빠 보였는데 내 손 안의 앱은 조용했다. 어쩔 수 없었다. 저녁을 챙겨 먹고 대리기사로 출동 준비를 하고 앱을 켰다. 첫 번째 콜은 다행히 집 근처에서 15분 거리의 대단지 아파트로 가는 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