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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Sep 24. 2024

#16. 다정한 카푸치노

*소설입니다.




꿈이었지만 있었던 일인 듯 생생했다. 환한이의 전화번호 끝자리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공원 산책을 하면서도 내 머릿속엔 ''이라는 여자로 가득했다. 그녀의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아 다녔다.


환한이는 거의 18년 전에 연락이 끊긴 대학 친구일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불쑥 찾아가서 그의 아내의 외도 사실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까? 나한테 그런 얘기를 듣는다면 그는 어떤 기분일까? 혹시 이미 알고 있는 것일까? 이혼을 하라고 조언을 해야 하나? 비슷한 경험자였지만 혜안은 없었다.


 다 각자의 인생이고 인생은 각자의 선택대로 흘러간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때문이었다.  


하지만, 환한이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내가 쓰러지면 날 일으켜주던 그런 존재였다. 가 나라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말했을까?


남의 인생에 오지랖 떠는 것?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일단 덮어두었다.     

 



서준이 기말고사 시험이 다가왔다. 노력하지 않고 무기력한 아들의 모습을 보니 참으려고 해도 마찰이 생겼다. 마음속에 답답함이 차올라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서해안 대부도 쪽으로 향했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면 스무 살 때부터 멀지 않은 대부도 쪽을 자주 갔었다. 목적지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운전을 했다. 하절기라 그런지 6시가 다 되어해는 지지 않았다.


바다에 앉아 일몰 보고 싶다.’


어느새, 서준이와의 답답했던 일상은 날아가고 붉은색이 내 몸을 감싸안는 느낌에 황홀해졌다. 예전에 와본 적 있는 카페에 멈춰 섰다. 카페 앞에는 이미 차 댈 곳이 없었다. 옆 건물인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차를 세웠다. 불 꺼진 공인중개사 사무실에도 차가 많이 대어져 있었다. 나도 복잡한 차들 뒤에 주차했.


'커피보단 맥주인가? 딱 한 캔만 마시고 술 깨고 가자.'


카페 에 있는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과 새우깡을 샀다. 차에 있는 캠핑 의자 2개와 테이블을 챙겨 일몰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행은 없었지만 궁상맞게 보이고 싶지는 않아 의자 하나를 내 옆에 세팅했다.


“치익~”


맥주 한 모금을 시원하게 마시고는 새우깡을 뜯었다. 나도 하나 먹고 갈매기에게도 하나 던져 주었다. 냄새를 맡고 멀리서 잽싸게 날아와 새우깡을 낚아채는 한 갈매기에게 중얼거렸다.


"끼룩아, 너도 참 먹고살기 힘들지?"

"..."


우리는 사이좋게 안주를 나눠 먹으며 밥 벌어먹고 살기의 고단함에 대해 마음을 나눴다.  


"그래도 넌 매 순간 살고 싶지?"  


그 집단도 치열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간들처럼 번뇌는 없어 보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굶느냐 먹느냐' 딱 그 정도였다. 물론 그 문제는 나에게도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기본문제이는 했지만 말이다.


기본문제를 해결하면 응용문제, 심화문제를 풀어야 했고 제법 고난도였다. 그래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외로움, 슬픔, 미움, 미련, 원망, 분노 등의 문제를 어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 방법을 찾기 힘들었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심화문제를 벗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숙제 같았다.



사랑을 나누는 풋풋한 20대 커플, 갯벌에서 게를 잡아 부모에게 자랑하는 어린아이들, 손을 꼭 잡고 다니는 노부부, 남편 흉보는데 열을 올리는 아줌마들까지 모두가 나를 외롭게 했다.


지는 해를 품은 바다는 차분하게 나를 토닥였지만 가슴속에 뭔가가 차올라 눈물이 찔끔 났다. 바닷바람에 나를 맡겼다.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고는 짙어지는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다. 이런 날 마땅히 부를 친구가 없다는 사실에, 그 흔한 내 편 하나 없다는 느낌이 나를 더욱 외롭게 했다. 외로움은 차갑고 단단한 빙산이 되어갔다. 수면 아래 숨겨진 외로움의 크기는 알 수도 없을 만큼 컸다.




서준이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었나 싶어 가방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가 2통, 문자 1통이 와있었다. 저장된 번호가 아니었다. 차를 빼달라는 문자가 10분 전에 와 있었다. 전화번호 뒷자리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010-****-0091. 설마? 아닐 거야.'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10분째 기다리고 있을 상대방에게 미안함이 들어 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내 차 앞에 있던 흰색 SUV차량은 헤드라이트를 켠 채 대기 중이었다.


'미니쿠페 아니네. 아니었구나.'


죄송하다는 말보다 차를 빼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얼른 내 차를 빼서 멀찌감치 댔다. 그럼에도 앞에 있던 흰 차는 움직이지도 않고 나와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뭐야? 안 나가나?"


나는 잠시 그 흰색차를 쳐다보다가 이내 바닷가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15분쯤 지났을까? 남은 맥주를 털어 넣는데 누군가 내 앞에 테이크 아웃 커피컵을 올려놓았다.   


"차 가지고 왔으면서 맥주 마셔도 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이런 곳에서 다 보네. 백수민.”


어, 너...”

"혹시  이름을 모르는 거야?"


"그게 아니라..."

"앉아도 되지?"


환한이는 내 옆에 있던 캠핑의자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의 등장에 나는 목이 탔다. 그가 내 앞에 올려놓은 커피를 고맙단 말도 없이 들었다. 커피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었을 때, 내 몸속 외로움은 녹아내렸다.


원두를 곱게 갈아 내리고
부드러운 거품을 만든 다음  
시럽 2번을 펌핑한 후
시나몬 가루까지 뿌려주면
완성되는
나만의 커피


'아직 기억하고 구나. 다정한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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