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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Sep 19. 2024

#14. 마스크 안팎의 진실게임

*소설입니다.





2022년 3월. 새 학기가 밝았다. 서준이는 북한군도 무서워한다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아침 공기는 봄이지만 늦가을처럼 쌀쌀하기만 했다. 공부 얘기, 진로 얘기 등을 꺼내면 바로 한파가 몰아쳤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나는 서준이 교육에 꽤 열성적인 엄마였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기대는 많이 소박해졌고 애틋함은 더욱 커졌다.


서준이가 아침도 먹지 않고 쌩하니 나가면 나는 아파트 베란다 창문에 매달려서 밖을 내다보았다. 함께 등교하는 친구는 있는지, 어깨가 축 처져서 가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서준이의 키가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아들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서준이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하는 사춘기였다. 아이의 사춘기가 심해질수록 내 마음은 외롭고 쓸쓸했다.  


할 일을 자꾸 만들었다. 나의 병을 알기에 의식적으로 더욱 바쁘게 생활했다. 유튜브의 아침형 사람들처럼 나도 하루의 루틴 만들기를 시작했다. 아침 식사 준비 후 독서, 간단한 아침 운동 겸 산책, 명언 필사까지 했다.  


"오늘 아침도 남들만큼은 했어."


남들만큼은 참 뿌듯했다. 내면이 일어선 느낌이었다.



<공지사항>
"음식 배달만 하지 말고 사람 배달도 하세요."


배달플랫폼 회사가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는 모양이었다. 여성고객을 위한 대리운전 사업에 진출하려는 모양새였다. 여성 대리운전기사에게는 초기 활동 지원금도 있었다. 무사고 15년 경력, 부드러운 주행 실력에 배달로 다져진 주차 실력. 나도 제법 이력이 괜찮았다. 자칭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오늘의 명언처럼 갑자기 도전할 용기가 생겼다. 여성대리기사 모집이라는 배너를 클릭했다. 다음, 다음을 누르다 보니 쉽게 대리기사가 되었다. 이로서 투잡러가 되었다. 낮에는 배달기사, 밤에는 대리기사.  


크게 어려운 건 없었다. 대리기사도 콜이 배정되면 움직이면 되었다. 술 마시기 좋은 날이 대목이었다. 배달기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콜이 배정되면 차를 두고 몸뚱이만 챙기면 된다는 것이었다. 도착하면 날 기다리는 것이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도 큰 차이였다. 그 점은 오히려 피곤했다. 하지만 때론 잠이 깰 만큼 자극적이었다. 취객들이 풀어놓는 비밀들은 40대 순진한 아줌마를 놀라운 세계로 인도했다.  


“기사님, 여기가 공사 현장 함바집이라 잘 찾아오셔야 해요.”


고객은 씩씩한 20대 여자 같았다. 나는 공사 현장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는 예전에 일일 공장 알바를 해본 킵스텍 근처였다.


“기사님, 지금 어디세요?”

“킵스텍이라는 공장 근처인데 아세요?”


“잘 찾아오셨네요. 그리로 갈게요.”


킵스텍 주차장에 서서 고객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곳에서 이는 흙바람과 어울리지 않는 깜찍한 외제 차가 내 앞을 쓱 지나갔다. 차량의 뒷모습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세리프체로 멋스럽게 'Shining star'라고 적힌 스티커가 부착되어 있었다.


'어! 그때 아파트 주차장에서 본 그 차 스티커랑 같네. 차도 미니 쿠페고.'


대게를 배달하고 나온 환한이로 착각한 그 남자가 급하게 몰고 갔던 그 차와 모든 것이 비슷했다.


그때 고객이 나를 불렀다.


“기사님.”

“아, 네.”

“출발하시죠.”


나는 고객의 차 운전석에 타서는 빠르게 내부를 훑었다. 대충 조작법을 파악한 후 시동을 걸었다. 그녀 일행들을 태우고 술집 번화가로 향했다. 마스크를 낀 그녀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아까 옆 테이블에서 혼자 밥 먹던 남자 말이야.”

“본사에서 온 사람이라던데.”

“나도 들었어. 공장 증설 건 때문에 왔대.”


킵스텍 옆에 한 동을 추가로 짓는 공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깐깐한 사람인지 공장장이 엄청나게 피곤해하더라고.”

“그래? 얼굴은 순진해 보이던데?”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훔쳐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빠져들었다. 그녀들은 대리기사라는 존재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BMW 미니 쿠페 타고 다니더라.”

“돈 많은 남자인가 봐.”


“미니 쿠페는 그렇게 안 비싸.”

“어쨌든. 키도 크고 얼굴도 멀끔하던데, 싱글이면 꼬셔볼까?”


기집애, 너 유부남도 꼬시잖아.”

"그러게. 난 요즘 총각, 돌싱보다 유부남이 제일 낫던데."


아까 내 앞을 지나간 외제 차 운전자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혹시 환한이?' 라는 생각이 들 때면 아닐 거라며 무표정하게 내비게이션에만 집중했다. 술과 남자가 고파보이는 젊은 그녀들을 유흥가에 데려다주었다.  




술집이 즐비한 곳이라 다음 콜을 금방 잡았다. 도착지에는 40대 후반의 투피스 차림의 전문직 여성과 부하직원들로 보이는 남자들이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 여자가 뒷좌석 문을 여니까 남자들이 깍듯이 인사를 했다.


“내일 회사에서 보자고.”

“네. 이사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녀는 회사에서 이사인가 싶었다. 외제 차에 명품을 두른 걸 보니 연봉도 제법 많으리라 추측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학원 다녀왔어?”

“아빠도 늦고 엄마도 늦을 거야. 먼저 자.”


아직도 남은 일과가 있는지 워킹맘들 대단하다고 생각할 무렵, 그녀는 자녀와의 전화를 끊고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피스텔이지?”

“대리 불러서 가는 중이야. 와인 한 잔 하자.”

“샤워가운 좀 준비해 줘. 바로 씻고 싶어."


나는 그녀의 요구대로 중간에 유턴을 해서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곤 또 그녀의 요구대로 도착지 두 블럭 앞 횡단보도에서 블랙박스를 껐다. 그리고 그녀의 세단을 고급 오피스텔 주차장 구석진 자리에 은밀하게 대주었다.


내가 운전석에서 내려 걸어 나가는 사이, 그녀는 뒷좌석에 정장 재킷을 벗어두고 롱 카디건을 걸쳤다. 마스크 낀 얼굴에 모자, 선글라스까지 착용하니 2분 전 이사님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건물로 들어갔다. 순간, 나는 죽은 남편과 한 여자사이좋게 호텔로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벌레 같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내 몸속을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그만하자.'


앱을 끄려는데 도착지가 눈에 들어왔다. 버스를 타면 집까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마무리 콜이라 생각하고 콜을 잡았다. 그러곤 고객과 통화를 했다.  


“기사님, 자유모텔 옆 건물 주차장에 있는 붉은색 차예요. 저는 조수석에 있어요.”


술집과 모텔들이 즐비한 곳을 걸어갔다. 술에 취해 뒤엉켜있는 남녀들이 참으로 많았다. 화려한 불빛들로 주차된 차 색깔조차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잘 찾아오셨네요.”


마스크에 모자까지 착용한 여성이었다. 때마침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마스크는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도구였다. 그녀에게 마스크가 없었어도 이런 대화가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마스크가 나를 가려준다고 착각하는 사이, 나의 비밀은 무방비로 세상에 노출되기도 했다. 그녀의 거침없는 대화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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