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수광부 Sep 14. 2024

#12. 정말 인연이었을까?

*소설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공강시간이 생기면 중앙도서관에 자주 갔다. 공부가 어렵거나 고민이 있을 때면 혼자 도서관 열람실로 도망치곤 했다. 열람실 자리에 엎어져서 전공 서적을 베개 삼아 누워서 창밖을 자주 보았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나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보통 시험기간이 아닌 도서관에는 취업 준비생, 고시 준비생, 복학생 등이 주로 지정석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1학년 새내기였음에도 지정석 아닌 지정석을 꿰차고 있었다. 주로 엎드려서 말이다.


쌀쌀하게 찬바람이 부는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나의 도피처, 도서관에 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멀티미디어실에 가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사이에 내 자리에 메모 하나가 붙어 있었다.   


“지나치기 힘든 인연이 있습니다.




설렐 뻔했지만, 멘트가 올드했다.


'아뇨. 그냥 지나쳐도 될 것 같아요.'


나는 감성 부족에 삐딱한 상태였다. ‘인연’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난 군대를 다녀온 애인이 급한 복학생.'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애인을 만들고 싶으나 마음대로 안 되는 아저씨들의 외침과 같아 보였다.


 쪽지를 누가 줬나 두리번거리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나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서관이 내 안식처이자 도피처인데 이곳이 불편하면 안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축적된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잘난 남자들은 굳이 저런 쪽지로 대시를 하지 않는다.


고개를 파묻고 전공책을 읽으며 메모를 모른 체했다. 그래서인지 다음 날에는 달달한 초코바가 놓여있었고 그다음 날에는 따뜻한 캔 커피가 놓여 있었다. 나는 결국 어떤 인물인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대체 누구일까 싶어 모두가 숨죽이며 공부하는 열람실 내부를 훑었다. 그러다 눈을 마주치지는 못하지만 나를 의식하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내 책상 위에 놓여있던 캔 커피를 들고 저벅저벅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혹시 이 커피 그쪽이 준 거예요?”


그는 나의 거침없음에 놀랐는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잠깐 휴게실로 나오라고  손짓을 하고 먼저 휴게소로 향했다.


“혹시 몇 학년이세요?”

“1학년이요.”


복학한 1학년이요?”

군대 안 간 1학년인데요.”


“아~그럼 같은 학번이네요.”

“그런가 보네요.”


“저기 죄송한데 왜 자꾸 뭘 올려두시는 건가요?”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낭만도 배려도 없는 돌직구를 날렸다. 그 이유는 그의 외모는 내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에서 홍콩배우 임지령 같은 외모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와 비스무레하게 생긴 턱선조차 발견하지 못한 나는 괜히 그에게 쏘아부쳤다. 그도 당황한 듯했다.


“저는 이환한이라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세상을 환하게 비추며 살라고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마음속에서 '어쩌라고?'라는 말이 나왔지만 참았다.


“그런데요?”

“그래서 환하게 비추는 중이에요.”


“네? 제가 어둡기라도 하다는 건가요?”

“적어도 처음 봤을 때보다는 그래 보여요.”


도대체 이 남자 뭐지? 나를 꿰뚫고 있는 이 남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이 이름과 미소만은 환한 남자에게 제안했다.


“저기 환한이? 나랑 친구 할래?”

“친구? 왜요?


"왜요라고 묻는다면... 그냥이라고 답할게...요."


그는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그래. 하자. 친구"


그것은 우리 둘에게 최적의 협상안이었다. 나에게는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지만 좋은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는 기회였다. 환한이에게는 마음이 쓰이는 여자에게 1차로 까였지만 가까이에서 친해질 기회였다.  


“너 이름이 SM 맞지?”

“어떻게 알았어?”


“책에 적혀있던데. SM이라고."

“수민이야. 백수민. 백수는 되지 말아야 할 텐데.”


흐흐. 은근 화끈하고 재미있는 아이구나.”

“SM엔터테인먼트에 길거리 캐스팅되는 게 소원이야.”


“하하하. 너 되게 웃긴다.”


그렇게 우리는 남과 여로 이성 관계였지만 이성적 감정은 덮어 둔 친구가 되었다. 당시 누구에게 환한이를 소개할 때면 ‘나의 소울 메이트’라고 소개하곤 했다.





컴컴한 주차장, 차 안에서 멍하니 옛 생각에 빠졌다. 저녁 피크타임이 다가왔지만 다음 콜을 잡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플랫폼을 이용한 프리랜서인 배달기사의 장점이 바로 이것이었나 보다. 일하기 싫으면 눈치 볼 필요 없이 바로 퇴근할 수 있다는 것.


집에 가보니 서준이가 돌아와 있었다.

“캠프 끝났어?”

“몰랐어?”


서준이가 돌아오는 날도 잊을 만큼 배달에 몰입했나 보다. 준비된 저녁거리가 없어 다시 배달앱을 켰다. 이번에는 배달기사가 아닌 고객이 되었다. 역시 요망한 플랫폼이었다. 퇴근했는데 다시 출근한 기분이었다. 나는 배달할 때보다는 여유롭게 주문을 했고 나의 동료는 어김없이 정확한 시간에 음식을 배달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따끈한 볶음밥과 파스타를 즐길 수 있었다.


“캠프는 어땠어?”

“그냥.”


그 정도면 좋았다는 얘기다.


“가서 뭐 했어?”

“독서도 하고 명상도 하고 글도 쓰고. 이것저것.”


뭔가 내면이 꽉 차는 것들을 하고 온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들과의 식사를 마친 후 일찍 씻고 자리에 누웠다. 갑자기 옛 추억을 더듬어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치해 둔 블로그에 들어가 보았다. 마지막 글은 신간 도서의 서평 이벤트 글이었다. 문화상품권과 내 영혼을 맞바꾼 글.


‘지긋지긋하다.’


나는 그 글을 삭제하고 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전 11화 #11. 운수 좋은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