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해를 넘기지 않고 마침내 편집 디자인 포트폴리오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동안 만든 작업물 가운데 마음에 드는 열아홉 개를 엄선하여(실은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제외하고 남은 것을 그러모아) 24년도 포트폴리오에 담았다.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대전에 입원한 엄마를 간병하러 가서도, 치료실에 들어간 엄마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노트북을 켜서 작업했다. 눈 뜨면 작업하고, 작업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되어 있었다. 작업 일정을 짰고, 매일 ‘오늘의 할당량’을 정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계획이었다. 나는 여전히 느리고 집요한 사람이었다. 내가 세운 일정에는 이러한 나의 특성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았다.
스스로와 약속한 마감 기한이 하루하루 늦어졌고, 스스로를 질책하는 날도 하루씩 늘어 갔다. 왜 이것밖에 못하니. 왜 이것밖에 안 되니. 익숙한 질책과 비난이었다. 편집자로 지내는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내 자신에게 했던 말이니까. 다만 이번 질책과 비난 안에 내 작업물에 대한 만족도 항목은 빠져 있었다. 나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세련되거나 높은 수준의 기술이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내가 뜻하는 바를, 나의 생각을, 나의 세계를 온전히 구현해 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내 작업물이, 나라는 사람이 꽤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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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에 재미를 느끼는지 아는 게 중요해요. 재미있는 일을 하세요. 재미있는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될 거예요.”
심리 상담 선생님이 말했다. 꼭 돈을 벌어다 주는 일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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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은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의 시간이었다. 나는 역시나 하고자 마음먹은 일에 대해서는 나의 전부를 갈아 넣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적당히’가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의 느림은 집요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는 내가 욕심내고 재미있어하는 일에서는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조건이라는 것도, 여전히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도 다시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집요함이 싫다. 나를 갈아 넣는 게 무섭다. 나를 위험에 빠뜨리고 해치는 일이니까. 하지만 떼어 내지 못할 것,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짐이라면 나에게 이롭게 쓰일 수 있게 용도를 바꿀 수는 없을까? 이러한 기질이 어떤 상황에서 발현되어야 위험하지 않고 이로울 수 있는지 알면, 사는 게 조금은 덜 힘들지 않을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나에게 오롯이 집중하며 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 이 조건과 상황에서만큼은 나의 전부를 쏟아붓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기질이 조금은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거 같다. 내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고 내가 만족할 만한 수준의 작업물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얻은 성취감과 희열이 희생과 집착으로 생긴 고통의 많은 부분을 상쇄시키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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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포트폴리오 레이아웃은 뒤로 갈수록 낫다. 뒤로 갈수록 더 역동적이고 재기 발랄하다. 앞부분에는 내가 자신 있는 작업물을 얹고 뒷부분에는 자신감이 조금 떨어지는 분야의 작업물을 얹었는데, 자신 없는 내용물을 그릇이라도 좋을 걸 써서 내놓으니 그나마 나아 보인다. 의도치 않게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춰졌다.
만약 다른 분야의 작업이었더라면 분명 앞부분을 뒤늦게 수정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또 뒷부분이 성에 안 차서 수정하고, 앞부분을 또 수정하고, 수정의 무한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심했다. 수정하지 않기로. 나의 미숙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나의 세계에서는 그래도 된다고. 중요한 건 작업을 진행하면서 내가 성장했다는 거다. 성장의 폭이 아주 미미할지라도. 나는 내 성장의 증거와 시간을 그대로 남기고 보존하기로 했다.
놀랍다. 내가 나의 모자람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끝을 선언할 줄 아는 사람이라니.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무언가에 이렇게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새롭게 발견한 내가 낯설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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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순간 새로운 파도가 찾아온다. 눈감는 그 순간까지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올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파도를 탔을까. 파도 타는 실력은 좀 쌓였을까. 나아졌을까? 분명 그랬을 거다. 의미 없는 파도는 없었고, 허투루 탄 파도도 없었다. 나는 매순간 최선을 다했고, 최선을 다해 성장했다.
나는 파도를 꽤 잘 타는 사람이다. 이 사실을 유념할 것. 앞으로 또 얼마나 거친 파도를 맞이하게 될지는 몰라도, 이미 내 안에는 파도타기를 할 충분한 기술과 자질, 힘이 있다. 파도의 거센 기운을 처음 맞닥뜨리는 순간은 힘들지라도 결국은 이겨 낼 것이다. 훌륭한 서퍼로서 능숙하게, 즐겁게, 나의 방식대로 서핑할 것이다.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를 살아 낸 나는 더 믿음직하고 강한 서퍼가 된 게 분명하다. 나는 나의 힘과 가치를 확신할 만한 근거가 충분한 사람이다. (25.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