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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be a Queen,

기고 죠스

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3. 2024

Don’t be a Queen, Just Be a Drag


  한국에서는 ‘Poker Face’라는 노래로 유명한 레이디 가가 (Lady GaGa). 그에게도 머라이어 캐리 (Mariah Angela Carey)의 캐롤같이 든든한 평생연금이 있다. 다만 그 연금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퀴어들의 프라이드로부터 나온다. 바로 ‘Born This Way’이야기이다. 당신이 어떤 피부를 지녔든, 당신의 경제 상황이 어떠하든, 당신의 성 정체성이 어떠하든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이 노래에는 ‘Don’t be a drag just be a queen’이라는 가사가 여러 번 등장한다. Drag (이하 드랙)이 ‘지겨운 사람’을 뜻함과 동시에 ‘Drag Queen (이하 드랙 퀸)’이라는 합성어의 일부라는 사실에서 착안한 일종의 언어유희다. 


  ‘드랙’은 성별이분법적 기표에 따라 자신에게 강요되는 차림새와 태도 대신, ‘다른 성(性)’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지는 복장, 몸짓 등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드랙 퀸은 드랙의 하위분류로서, ‘여성’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화장, 옷, 언어, 걸음걸이 등을 모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아이돌 가수 조권이 ‘Born This Way’를 부른 무대의 영상 클립이 도움이 될 것이다.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를 부르고 있는 조권>[1]<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를 부르고 있는 조권>[1]

  2017년 ‘골든 탬버린’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인의 ‘피어나’, 비욘세(Beyoncé)의 ‘Crazy in Love’를 연달아 부르며 여러모로 화제를 모았던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노래가 바로 ‘Born This Way’였다. 분장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화장과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 의상, 하이힐, 금발의 긴 머리로 카메라 앞에 선 조권은 곡을 부르던 중간에 가발을 벗어던지는데, 무대를 마치고 그는 가발을 벗어던진 이유로 “레이디 가가가 아닌, 여장(남자)도 아닌, 이 그대로가 저 조권이라는 걸”[2]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탄탄한 노래 실력과 무대 매너만으로도 볼거리가 풍성했지만, 조권은 거기서 더 나아가서 그 마지막 무대를 통해 그간 여장을 한 자신에게 쏟아졌던 희롱과 악플에 응수하고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대는 악플러들에 대한 멋진 반격임과 동시에 드랙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되었다. 


  드랙적 자아는 젠더 수행을 괴기스러울 정도로 과장하여 표현하거나, 알맞은 짝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몸과 성적 재현을 서로 ‘끼워 맞추면서’ 탄생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남성성’을 연기하는 드랙킹을 예로 들어보자면, 대부분은 일부러 얼굴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그려 넣고, 눈썹을 짙게 만들거나 헤어 왁스를 과하게 발라 기름진 머리를 넘긴 모습을 하고 있다. 퍼포머들이 제각각 남성의 몸이라고 해석되는 여러 특질들을 자신의 몸에 대입시킨 것이다.

<드랙킹 아장맨> [3] <드랙킹 아장맨> [3] 

  드랙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가 ‘여성’의 몸에 사진과 같이 분장을 한 드랙킹이 아주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을 본다고 상상해 보자. 처음에는 당연히 ‘남성’이겠거니 여길 것이다. 머리가 짧고, 수염 자국이 있으니까. 그러나 서로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행인은 가짜 티가 나는 수염과 같이 오히려 ‘남성’임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낸 여러 특징들이 조금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며 그 사람의 성별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스쳐 지나갈 때쯤이면 자기가 본 사람이 사실은 페니스가 없는 인간임을 깨달을 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서로 들어맞지 않는 몸’들을 한꺼번에 입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눈을 아주 일시적일지라도 속이는 행위는 그간 세상에서 바꿀 수 없는 진리인 것처럼 여겨졌던 ‘성별’이라는 구분 체계와 그를 둘러싼 사회적인 통념, 차별이 얼마나 허위적인지를 폭로한다. 이런 폭로는 예컨대, 조권이 했던 것과 같은 드랙퀸들의 ‘가발 던지기’ 퍼포먼스나 가슴을 감추지 않는 드랙킹들의 퍼포먼스에서 극대화 된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완벽한 여성’, ‘완벽한 남성’을 연기했던 그들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몸도 긍정할 때 그걸 지켜보는 관객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규범적인 사고가 뒤집히고 뒤섞이는 혼란스러운 경험을 할 것이다.  


  설령 자신이 지정받은 성별과 동일한 성별을 가진 드랙을 수행한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시스젠더(Cisgender) 여성이 드랙퀸을 연기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때 그는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거나, 혹은 보정 효과가 강한 속옷을 입고, 속눈썹을 여러 겹 붙이고 가채같이 무거운 가발을 쓰는 등 가부장적 세상의 요구를 ‘과도하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평범한’ 여성의 모습에는 걸맞지 않고 전형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이질감을 느끼는 이들은 곧 ‘정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이 떠올림에 대해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 간혹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굳이 환기되지 않는 것들을 곱씹어 생각해보는 행위는 그 자체로도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드랙을 하는 몸은 단순히 유흥적 의의를 넘어선다. ‘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롭고 순수한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것의 존립이 가능한지 자신들의 존재로써 질문하고, 세상을 구성하는 프레임 자체를 뒤집는 것이다. 나아가 유구한 성차별의 토대였던 성별의 경계를 희석시킨다면 성차별하려는 시도 또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드랙 또한 완전무결한 문화가 아니다. 하위문화였던 드랙을 대중문화 층위 가까이 끌어올린 미국의 TV쇼 ‘루폴의 드랙레이스’는 아직까지 여성 드랙퀸 퍼포머의 참가를 금지하고 있으며, 참가자들의 경쟁에서는 완벽하게 고정된 화장,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등이 강조된다. 많은 드랙바에서는 여성 드랙킹들이 퍼포먼스 도중 자신의 가슴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막는다.[4] 주로 시스젠더 남성으로 구성된 드랙퀸들에 비해 시스젠더 여성으로 구성된 드랙킹은 아직 가시화되지 못했고, 무대에 설 기회를 충분히 얻지 못한다. ‘드랙 퍼포머’라는 집단성을 걷어 내고 보면, 그 안에도 아직 떨치지 못한 권력의 위계가 존재하는 것이다.[5] 드랙 문화가 더 깊은 내부 성찰 없이 이러한 사회 구조를 답습하는 데서 멈춰 버린다면, 드랙의 의미는 전복과 프라이드가 아니라 단순한 오락거리에서 멈춰 버리고, 혐오문화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는 드랙문화 향유자들이 가장 원치 않는 수식어일 것이다.  


  그래서, 드랙계 내부에는 진중한 고찰을 권하고, 아직 드랙문화가 익숙지 않은 이들에게는 드랙문화의 가치를 압축적으로 전하고자 ‘Born This Way’의 가사를 아주 살짝 변주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Don’t be a Queen, Just be a Drag.” 지금의 드랙 문화가 소수자 담론을 담지함과 동시에 유쾌함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많은 드랙 퍼포머들이 성별 이분법을 깨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오락적이고 쾌락적인 방식으로 ‘불편한 진실’을 끝까지 물고 뜯기 때문이다. 그러니 드랙은 ‘여왕(女王)’이 아니라, 끝까지 호쾌하고 ‘성가신’ 존재이고, 그래야 할 것이다. 



[1] Mnet, <골든 탬버린>, 11회차 (2017.02.23.) 영상 캡처

[2] 위의 방송

[3] <내가 드랙(Drag)을 하는 이유>,미디어 일다, 2018.11.14.,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7&aid=0000006074

[4] 일다, 위의 글

[5] 민문 (진윤선), 「혐오에 맞서는 아름다움, 드랙」, 『함께가는 여성』 (224), 여성 민우회,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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