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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8호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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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4. 2024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편집위원 야부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긴다면[1]

  

  최근 개봉한 영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는 전작에 이어 수많은 멀티버스에서 온 스파이더맨들이 등장한다. 기존의 도식화된 스파이더맨을 벗어난 다채로운 모습의 스파이더맨들 가운데 휠체어를 탄 스파이더맨이 눈에 띈다. 전통적으로 슈퍼히어로물에서 장애는 빌런의 것이었다. 각종 미디어에서 빌런의 장애는 악당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로 그려진다. 그들은 어딘가 ‘비정상’으로 인식되는 몸을 가지고 있으며, 장애는 그들의 태생적인 결핍, 그리고 이로 인해 뒤틀리고 비뚤어진 마음을 설명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커트 코너스 박사는 오른팔이 없는 장애인으로 새로운 팔을 만들어줄 수 있는 혈청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본인을 대상으로 임상 실험을 한다. 이것이 부작용을 일으켜 그는 폭력적인 인격으로 변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하고 ‘흉측한’ 도마뱀의 외형을 가지게 된다. 심지어 그는 장애를 ‘고치겠다’라는 목적으로 혈청을 분사해 다른 사람들까지 자신과 비슷한 커다란 도마뱀의 몸으로 만든다. 


  반면 비장애인 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슈퍼히어로에게 장애는 운이 나빠 일어난 일시적인 시련 중 하나일 뿐, 그들은 금세 장애를 ‘딛고 일어서는’ 영웅적 면모를 보인다. 사실 이들은 영구적인 장애가 있다고 해도 영화 안팎에서 장애인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런 인물들은 결국은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혹은 그 이상으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며 이들에게는 장애인으로서 자기의식이나 정체성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윈터 솔져는 왼쪽 팔이 절단되어 강철 팔을 장착하고 있지만 관객들은 그를 장애인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그를 장애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일종의 모욕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그의 팔은 장애인이라는 말이 연상하는 ‘무능하고 의존적인’ 유형의 것 아니라, 엄청난 힘을 가진 그만의 독보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장애를 ‘극복’한 ‘슈퍼휴먼’으로서의 장애인은 미래에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사이보그 장애인’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이 ‘사이보그 장애인’은 인공 보철을 장착한 채 인간 본연의 한계를 뛰어넘는 만능의 모습을 보인다. 조금의 흠도 없이 매끄러운 몸을 가진 이들은 앞으로 등장할 신인류로 호명되기도 한다. 이들은 보조 공학 기기와 결합한 몸이라 해도, 어떤 몸은 대중이 열광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장애인들은 익숙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뛰어난 생산력을 증명해내는 이러한 몸들을 환영하고, 신기해한다. 


  그러나 영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는 ‘슈퍼휴먼 장애인’에 비해 평범하다면 평범할, 휠체어를 탄 스파이더맨이 잠깐이지만 그 모습을 비춘다. 누군가는 휠체어를 탄 슈퍼히어로라는 설정이 너무 억지스럽다고 말하기도 한다. 슈퍼히어로가 장애인이라면 아이언맨처럼 슈트를 입어서라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이다. 이러한 말에서는 휠체어는 어딘가 미비하고 불완전한 상태이며 (슈트와 같은) ‘정상’ 신체를 재현하거나 뛰어넘는 보철물은 그에 비해서는 발전된 단계라는 생각이 드러난다. 이때 장애의 유형에 따라 의족과 같은 보조 공학 기기보다 휠체어가 몸에 더 편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같은 사람도 상황에 따라 적합한 보조 공학 기기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은 간과된다.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것이 ‘정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이에 가까운 형태일수록 ‘완전’하다고 인식되는 것이다. 미디어 속 장애를 지닌 등장인물이 휠체어를 탄 경우에 대중들의 저항감이 더 큰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상적인 ‘보통’의 몸을 가지지 않은 존재 자체를 껄끄러워하는 것은 물론, 이 낯선 몸이 ‘보통’의 몸과 다름없이 기능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슈퍼히어로와 빌런의 상반된 장애 재현, 그리고 비장애인이 반기거나 그렇지 않은 슈퍼히어로의 장애 재현은 장애와 기술의 관계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던질까? 장애인은 이미 보청기, 점자정보단말기, 휠체어 등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다양한 보조 공학 기기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의 몸은 보조 공학 기기와 결합하더라도 사회적 정상성 안에 포함될 수 없다. 이상적인 몸이 규정되어 있고 이에 맞추어야 한다는 압력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눈에 띄는 보조 공학 기기는 장애인의 몸이 ‘알맞게’ 통제되고 규정될 수 없는, 예측 불가한 몸이라는 점을 부각한다. 이런 면에서 장애인은 기술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장애를 지닌 몸에 대한 논의는 늘 기술의 영역을 거쳐 간다. 여기에서 장애와 기술의 결합은 스티븐 호킹과 같이, 기술을 통해 신체적 한계를 이겨내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천재 장애인의 이미지로 상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애는 언제나 극복의 대상이며, 과학⋅의료 기술은 이를 위해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앞서 이야기한 미디어 속, 인간 이상의 능력을 펼치는 ‘사이보그 장애인’으로 확장된다. 비장애인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장애를 지녔지만 ‘유능하고 무해한’ 몸 앞에서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한 의존이 없어서는 안 되는 몸들은 지워진다. 결론적으로 어떤 기술은 장애인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또 다른 기술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의 규칙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장애인에게 강요되는 것이다. 이 두 상반된 목적의 기술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그리고 장애와 기술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국제 손상·장애·핸디캡 분류는 장애를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떤 사람의 몸에 손상이라고 간주될 수 있을 만큼의 이상이 존재하며 이 때문에 그 사람은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것”으로 정의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은 이 정의를 장애 관련 법률의 준거로 삼았다.[2] 장애인을 불능이라는 상태에 놓이게 하는 원인이 일정한 손상이라는 것은 매우 친숙한 도식이다. 단순히 생각했을 때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고, 두 팔을 사용할 수 없다면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그 연결고리에는 사회가 존재한다. 장애인에게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가, 다른 사회라면 손상을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손상이 장애로 이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다 보면, 손상을 가진 몸을 ‘정상적인’ 몸으로 ‘돌려놓는’ 것이 장애 문제의 첫 번째 해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래의 사례들에서 장애에 대한 이와 같은 접근을 엿볼 수 있다. 


  2023년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나쁜 엄마〉에서 주인공 강호는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마비된다. 그의 엄마 영순은 한순간에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진 아들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감행한다. 스스로 움직이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강호에게서 식판을 빼앗고 그를 강물에 밀어 넣기도 한다.[3] 영순이 ‘나쁜 엄마’가 되는 것을 견디면서까지 바랬던 것은 강호가 ‘보통’ 사람처럼 두 다리로 걷는 것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영순의 피나는 노력 끝에 결국 강호가 두 다리로 설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강호의 사고 이후 영순의 삶은 온통 강호가 장애를 이겨내도록 돕는 것뿐이었는데 강호가 어떻게 해도 혼자 일어설 수 없었다면, 강호까지 엄마의 희생을 배신하는 ‘나쁜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영순 역시 강호의 장애를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붙잡은 채 강호를 계속 몰아세우는 더 ‘나쁜 엄마’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장애를 ‘극복’해내는 감격의 순간보다는 장애 당사자도 이를 돌보는 사람도 괴로울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더 자주 일어난다. 장애를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하루빨리 없애버려야 할 것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시선을 지닐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현실은 이렇듯 장애 당사자와 그 주변인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장애를 극복한 미래’만이 유일한 선택지인 상황에서, 장애를 둘러싼 그 누구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장애를 ‘극복’하여 비장애인에 가까워지는 것이 장애가 초래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한국형 아이언맨 로봇으로 찬사를 받았던 워크온슈트4에 대해 살펴보자. 이 슈트는 하반신 마비 장애인을 위한 착용형 로봇으로 착용자가 비장애인의 보행 속도와 비슷한 속도인 분속 40m(시속 2.4km)로 걸을 수 있도록 개발되었다. 워크온슈트4는 이 슈트를 착용한 사이배슬론 선수들이 2020 사이배슬론 대회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이라는 큰 성과를 거두며 더욱 주목받았다.[4] 한편, 당시 대회에 참가해 동메달을 받았던 이주현 선수는 처음 기기를 착용하고 이에 적응해갔던 과정에서 느꼈던 두려움에 대해 말했다. 그는 기기를 사용하는 법을 익히고 나서도 기기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계속 긴장 상태로 있어야 했으며 이는 많은 장애인이 보조 공학 기기를 착용할 때 느끼는 감정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5] 보조 공학 기기를 착용하는 것은 이 같은 감정적 측면을 제외하고도 상당한 결심이 필요하다. 보조 공학 기기와 몸을 맞추어 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예측 불가능한 결함과 불가피한 교체가 발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혁신적인 신기술로 보조 공학 기기가 만들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이것이 매우 오랜 시간을 거쳐 상용화된다고 하더라도 장애인이 이를 평생 자신의 신체 일부로서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KT ‘마음을 담다’ 광고 ‘제 이름은 김소희입니다’ 유튜브 영상 캡처

  그러나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처음으로 장애가 없는 ‘그들의’ 세상을 마주하는 순간에 환상을 가진다. 많은 미디어는 이 환상을 바탕으로 장애인이 기술을 통해 손상을 극복하고 ‘평범’한 삶을 경험하는 과정을 낭만화하여 콘텐츠로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비장애인은 이러한 콘텐츠를 통해 장애인이 조금이나마 비장애인처럼 될 수 있어 얼마나 기쁠지 추측하며 감동받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평범한’ 몸에 감사함을 느끼기도 한다. KT의 ‘목소리 찾기’ 프로젝트가 한 예시이다. KT는 인공지능(AI) 음성합성 기술을 이용하여 태어나자마자 청각을 잃은 농인 김소희씨의 목소리를 만들었고 이 과정을 광고로 내보냈다. 해당 광고에는 김소희씨가 KT가 만들어낸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들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던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 광고 영상은 현재까지 천 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큰 호응을 받았지만, 장애의벽을허무는사람들(이하 장애벽허물기)등은 해당 광고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부추길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장애벽허물기는 ”해당 광고에서는 농인과 수어소통 장면이 거의 없었으며 수어를 할 수 있는 가족도, 수어를 배우려는 태도도 없었다. 그러나 이는 이들만의 잘못이 아닌 우리 사회의 주변 환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장애벽허물기는 이러한 광고는 한국어의 하나로 인정받은 수어를 비가시화하고 음성언어만이 완전한 언어라고 생각하도록 한다고 지적했다.[6] 사실 ‘목소리 찾기’라는 명칭 자체가 농인들은 청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소리 내어 말해야 한다는, 나아가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문화에 맞추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회적 인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장애가 있는 몸을 비장애인에 맞추기 위해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 수 있다. 비장애인 중심의 기술은 장애를 만들어낸 사회가 아니라 장애가 있는 개인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장애를 지닌 몸을 토대로 구축해온 삶의 방식은 철저히 무시된다.      


  수전 웬델의 『거부당한 몸』에서는 우리 사회는 규정될 수 없는 다양한 몸의 형태를 통제하고 완벽하게 만들려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믿음을 거스르는 것 중 하나가 장애라고 말한다. 장애는 일반적인 질병처럼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기에 치료라는 개념이 완전히 성립하지 않는다. 장애에 동반되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치료는 필수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비장애인의 몸과 비슷해지기 위한 교정이 치료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며, 그런데도 장애인의 몸은 비장애인과 완전히 같을 수 없기 때문에 부적합한 몸으로서 현대 기술과학의 실패에 대한 상징으로 남겨진다.[7]


  이 지점에서 인간의 몸이 가진 근본적 취약성을 견딜 수 없어 하는 트랜스 휴머니스트들이 등장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우리가 기술을 이용하여 인류의 미래 진화를 좌우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확신을 근거로 삼는다. 이들(트랜스휴머니스트)은 우리가 노화를 사망 원인에서 배제할 수 있고 그래야 하며, 우리가 기술을 활용하여 몸과 마음을 향상할 수 있고 그래야 하며, 우리가 기계와 융합되어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더 이상적인 모습을 개조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8] 요약하자면 트랜스휴머니즘은 앞으로 인간은 기계와의 결합을 통해 인간 본연의 정신적,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는 다소 무모하고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리기에 트랜스휴머니스트는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장애 문제를 가져온다. 지금 여기에 일종의 사이보그인 장애인이 존재하고 있으며, 모두가 ‘결함’ 없이 완벽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술 발전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그리는 세상에서는 어떤 몸이라도 기술의 힘을 통해 증강되어 있기 때문에 차별과 불평등이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필요할 때만 장애와 기술에 대한 논의를 잠깐 가져올 뿐인 부유한 백인 남성들이 상상하는 세상에 장애인이 낄 자리가 있을까.

김상희 씨가 구매한 다기능 전동 휠체어

  장애인 인권 활동가 김상희씨의 비마이너 칼럼 ‘29일간의 병원 생활’ 시리즈는 현실에서 장애인이 기술과 결합하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상희씨는 어릴 적 폭력적인 물리치료 과정에서 경추에 금이 갔었는데, 이것이 성인이 된 후에 극심한 허리 통증으로 나타나 결국 수술을 거듭하게 된다. 이후 그는 후유증 때문에 다리 관절을 자동으로 움직여 보행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로봇 치료를 받는다. 그는 이 로봇 치료의 목적 자체가 그가 바라는 통증의 제거보다는 ‘정상’ 신체처럼 기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만 있으며, 사용된 최첨단의 기기 역시 많은 재활 치료 기구가 그렇듯 장애를 지닌 규범 밖의 몸은 배제한 채, 비장애인의 반듯한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져있다는 것을 느낀다.[9] 이후 그는 고질적인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 끝에 고가의 다기능 전동휠체어를 구매했고 이는 통증을 줄여준 것은 물론 실생활 여러 면에서 접근성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이 언뜻 보기에 ‘요란한’ 휠체어를 사용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때로는 이를 쓸데없는 사치라고 치부하기도 했다. 김상희씨는 휠체어를 향한 이런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누군가 휠체어의 가격을 물어올 때마다 위축감을 느꼈다고 이야기한다.[10] 비장애인의 잣대가 장애와 기술의 결합에 개입하는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장애인은 어떤 기술과 만나더라도 자율성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어떤 테크놀로지와 만난 인간의 주체성은 이를 통해 기능적인 자유를 얼마나 획득하느냐가 아니라, 그 테크놀로지를 ‘지배할 자격’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11]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부여하는 ‘자격’은 기술이 일상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장애인의 기술 활용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장애를 지닌 몸들은 직간접적으로 기술과 만나게 된다. 기술은 장애를 지닌 몸에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으며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매우 필수적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해온 장애와 기술의 불화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많은 기술이 그 목적을 장애를 완전히 제거하여 ‘정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기술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장애 문제를 없앨 것이라는 생각이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더욱 공고해졌고 장애인을 억압하고 배척하는 기술에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기술이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규정하는 가치관에서 벗어난다면 얼마든지 유연하게 장애인의 삶에 들어와 실질적인 편리성을 제공할 수 있다.


  에이미 햄라이와 켈리 프리츠가 발표한 「크립 테크노사이언스 선언」[12]은 장애와 기술의 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한다. 두 저자는 기존의 주류 장애 기술은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상정하고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기술이었으며, 이때 장애인은 항상 기술의 혜택을 받는 소비자로만 남았다고 비판한다.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는 기존의 지식 생산과 소비라는 구도를 뒤집어 장애인과 장애 공동체가 직접 만들고 건설하는 기술 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특히 크립 테크노사이언스의 원칙 중 “통합이 아닌 정치적 마찰과 논쟁의 장소로서 ‘접근성’을 드러낸다”라는 대목에서 비장애인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가치적 측면으로서 접근성을 쟁취하겠다는 능동성을 읽어낼 수 있다. 당장 지하철 시위조차 혐오에 부딪히는 사회에서 장애인이 지식 생산자로 나선다는 것이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는 장애인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기존의 기술을 재구성하면서 자신에게 적합한 세계를 일구어나가는 것에 주목한다. 놀랍고 혁신적인 발견이 아니라 장애인의 일상적 경험 하나하나가 장애인에게 유용한 기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13]

  에이유디는 청각장애인이 의사소통과 사회 참여에서 겪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문자통역서비스를 제공하고, 문자통역에 필요한 IT 플랫폼을 개발하는 사회적협동조합이다. 박원진 이사장은 특수교육을 전공한 장애 당사자로 대학교 졸업 후 청각장애인이 접근 가능한 수업 환경과 관련된 모든 지원이 끊기면서 인터넷 강의조차 볼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에이유디를 설립했다고 한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도 청각장애인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문자통역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지만, 전국적으로 수어 통역센터만 있을 뿐 문자통역 지원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가운데 에이유디는 문자통역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여러 기관과 개인에 전문 교육을 받은 문자통역사를 파견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시의 문자통역 지원사업을 위탁 운영하면서 앞으로 문자통역 지원사업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14]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방식을 어떻게든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있든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이 기술이야말로 장애 중심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장애와 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먼 미래로 상정되었다. 한국 사회는 당장 ‘일부’가 겪는 문제를 신경 쓸 겨를이 없다며 대부분의 장애인 문제와 마찬가지로 논의를 미뤘고 현재 장애인이 어떤 기술을 통해 생활하고 어떤 기술에서 배제되고 어떤 기술을 바라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언젠가’ 존재할, 상공을 가로지르는 사이보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미래에 대체 무엇이 있을지는 겱코 장담할 수 없다. 그 미래에는 모든 몸이 장애 없이 ‘완전’할 수 있을까? 몸에 대한 사회적인 표준과 규범이 존재하는 한 어떤 기술이 개발되어도 장애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이는 김초엽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 주인공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게 아닌가.” 기술과 결합하여 증강된 몸 사이에서도 어떤 몸은 맞고 다른 어떤 몸은 틀릴 것이다. 결국 틀린 몸들은 여전히 남겨진다. 우리는 누구도 사회에서 밀려나 남겨지지 않도록 손상이 장애가 되는 비장애인 중심의 현재 사회 를 직시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비장애인의 생활양식을 따르도록 장애인을 등 떠밀어 합일하는 세계는 얼마나 편협한지 인지하고 절대적인 정상 없이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떠올려야 한다. 기술이 사회 전체가 연립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세계를 지금 여기로 가져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펼치는 상상,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행동이다.                              


[1]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 181. 

[2]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19, 60.

[3] 장하원, “‘나쁜 엄마’는 자식 강호의 장애에 가혹했다…괜찮은 걸까?”, 한겨레21, 2023. 6. 26.

[4] 장길수, “KAIST 공경철 교수 연구팀, '워크온슈트 4' 공개”, 로봇신문, 2020.06.15.

[5] 이주현, “아이언맨처럼 멋있지도 빠르지도 않지만”, 비마이너, 2021.07.22.

[6] 이가연, “우리는 ‘목소리 잃은’ 사람이 아니다” 농인들, KT 광고 차별 진정“, 비마이너, 2020.04.23.

[7]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황지성·김은정 옮김, 그린비, 2013, 186-189.

[8] 마크 오코널, 『트랜스휴머니즘』, 노승영 옮김, 문학동네, 2018, 15.

[9] 김상희, ”최첨단 재활 치료와 몸에 대한 환상“, 비마이너, 2021.08.07.

[10] 김상희, ”보조공학 기기와 나의 삶, 욕망에 대하여“, 비마이너, 2020.09.16.

[11] 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100.

[12] Aimi Hamraie and Kelly Fritsch, "Crip Technoscience Manifesto", Catalyst: Feminism, Theory, Technoscience, Vol. 5, No. 1, 2019.

[13] 김초엽·김원영, 앞의 책, 186-188.

[14] 김원영, ”소셜벤처 창업가들, 장애를 가진 삶을 존중하는 기술과 서비스“, 비마이너, 2021.07.20


참고문헌     

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마크 오코널, 『트랜스휴머니즘』, 노승영 옮김, 문학동네, 2018.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황지성·김은정 옮김, 그린비, 2013.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19.     

염수빈·정원희,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관람전 복습자료② '빌런 총정리' 편”, 서경스타, 2021.12.17.

장하원, “‘나쁜 엄마’는 자식 강호의 장애에 가혹했다…괜찮은 걸까?”, 한겨레21, 2023. 6. 26.

이주현, “아이언맨처럼 멋있지도 빠르지도 않지만”, 비마이너, 2021.07.22.

장길수, “KAIST 공경철 교수 연구팀, '워크온슈트 4' 공개”, 로봇신문, 2020.06.15.

최유경, “농인이 왜 음성언어로 말해야 하는가?”, 비마이너,  2020.04.06.

이가연, “우리는 ‘목소리 잃은’ 사람이 아니다” 농인들, KT 광고 차별 진정“, 비마이너, 2020.04.23.

김상희, ”최첨단 재활 치료와 몸에 대한 환상“, 비마이너, 2021.08.07

김상희, ”보조공학 기기와 나의 삶, 욕망에 대하여“, 비마이너, 2020.09.16

김원영, ”소셜벤처 창업가들, 장애를 가진 삶을 존중하는 기술과 서비스“, 비마이너, 2021.07.20




이전 07화 그늘에서 외치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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