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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8호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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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4. 2024

내년 오월에도 광주에 간다면

수습편집위원 어푸

광주로 가는 길


  5월의 어느 주말, 학교에서 꾸린 광주기행단원들과 함께 광주광역시로 향했다. ‘기행’으로 광주를 찾아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몇 해 전 떠나왔고 이제는 멀게 느껴지는 고향을 ‘역사기행’으로 방문한다는 것이 꽤나 낯설어, 광주로 내려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뒤에도 산발적인 질문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새삼스레 광주에 깃든 역사를 살피러 가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1980년 오월의 광주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던가, 그렇다면 이번 기행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수업을 대신해 보았던 다큐멘터리와 영상자료들, 평소에는 부를 일 없는 노래를 부르던 행사들, 광주 토박이 어른들이 해준 이야기들,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순간들이 떠올랐다. 광주에서 나고 자라며 보고 듣고 살았던 ‘오월’을 다시 방문하는 것은 어떤 감각으로 다가올까.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으로 금남로와 망월동 묘역을 차례로 방문하는 동안 몇몇 인상적인 장면을 마주쳤다. 그 장면들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묘한 이물감으로 남아서, 기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이 글은 그 장면들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광주기행의 장면들더불어민주당민주노총오월봄 순례단


  13일, 광주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구 전남도청이 위치한 금남로 일대였다. 문화해설 일정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밥을 먹고 전일빌딩245의 전시실로 올라갔다. 전일빌딩245는 고층 외벽과 내벽에 245개의 탄흔이 남아 있어 당시 헬기사격의 존재를 증명하는 공간으로, 오월을 맞이해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 안에서 나는 파란색의 삼각 깃발을 들고 전국에서 ‘민주화의 성지’를 찾아온 더불어민주당 당원들의 행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파에 떠밀려 일행들과 따로 떨어져 전시를 관람하는 동안에도 전시관 곳곳에서 이들과 동선이 겹쳤다. 그들 중 일부는 당시의 헬기사격을 재현한 애니메이션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전일빌딩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두 번째 장면을 맞닥뜨릴 수 있었다. 장구와 북을 어깨에 메고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고 있는 풍물패 너머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글자가 적힌 빨간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저마다 손에 “이대로 살 수 없다! 윤석열 퇴진!”이라고 적힌 빨간 피켓을 들고 있었다. 민주노총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 된 생중계 영상에서 이들은 80년의 광주를 “노동자, 시민이 모여 만들어낸 자치공동체”, “노동자 민중의 대동세상”으로 이야기하며, “2022년 또 다른 독재의 등장”, “검찰독재”에 맞서 “80년 5월 시민군의 정신으로 저항을 넘어 퇴진으로”[1]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이동한 전남대학교에서 세 번째 장면을 마주했다. 금남로에서 민주노총이 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면, 전남대 정문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공터에서는 ‘전국 대학생 오월봄 순례단’이 흰 티셔츠를 입고 일제히 트럭 차량 무대를 바라보며 오월을 기리는 문화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오월의 청춘, 역사를 지키다〉라는 제목의 문화제에서는 1980년 5월 당시의 참혹함을 담은 영상이 송출되었고, 뮤지컬 동아리가 뮤지컬 〈영웅〉의 대표곡인 〈누가 죄인인가〉를 공연하며 해방광주의 장면들과 구 전남도청에서의 최후 항전 장면들을 재현하였으며, 합창 동아리는 민중항쟁의 대표곡으로 불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기행의 경로에서 마주친 이들은 영령들을 기리는 동시에 ‘오월정신 계승’을 주되게 언급했다. 이는 방문객들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제43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의 공식 구호 역시 “오월의 정신을 오늘의 정의로”였다. 오월에 광주에서 개최되는 각종 기념행사들은 ‘오월정신’의 계승을 외치곤 하며, 이는 오월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광주라는 도시를 찾는 행위의 중심에는 ‘계승’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실천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때 계승하고자 하는 ‘오월정신’이란 무엇일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광주를 찾아와서 물려받고 이어 나가고자 하는 그 정신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 언급한 세 집단이 계승하고자 한 오월의 정신은 현재의 정치적 문제와 부착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월정신’의 보편적 의미는 어떤 과정을 통해 자리 잡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5·18이 전개된 흐름과 더불어 5·18이 각종 학술 및 정치 담론 속에 배치된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5·18의 배경과 전개이후 판결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되며 7년 동안 지속된 유신 체제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민주화에 대한 희망이 촉발된 것도 한때에 불과했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12월 12일 쿠데타를 감행해 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며 신군부 독재 체제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이듬해인 1980년 봄, 학생들은 민주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시위를 벌였고, 학내에서 이루어지던 투쟁은 점차 확대되어 5월 14일에 접어들어서는 학교를 벗어나 가두시위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14일과 15일 서울 지역의 대학생들은 광화문 등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2] 광주의 학생들 역시 5월 14일부터 3일 동안 금남로에서 행진하는 등 시위를 벌였고, 시민들이 합세해 5월 16일, ‘횃불집회’라고도 불리는 ‘3차 민주화대성회’가 개최되었다. 시위에서 박관현 전남대 회장은 학생들과 문제가 생길 경우 18일 오전 학교 앞에서 만나기를 결의했고, 17일에서 18일에 넘어가는 자정,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며 이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에서 오십여 명의 대학생들이 계엄군에게 등교를 저지당한 사건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위에 존재한다. 다음은 이후 열흘 동안 광주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5/18

비상계엄령 전국확대

전남대 및 금남로 시위 전개, 공수부대의 강경진압

5/19

공수부대원의 최루탄 공격, 시민들의 투석전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계엄군 첫 발포

5/20

십만여 명의 시민 시위 참여

택시, 버스, 트럭 등의 차량 시위

MBC, KBS 건물 방화

시위대 도청, 광주역, 조선대에 결집

5/21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 발생

공수부대 도청 사수 포기시위대의 도청 점령

5/22

공수부대의 광주 봉쇄작전 전개

광주광역시 내부 수습대책위원회 형성

5/23 

민주 수호 범시민궐기대회 개최

5/24

온건파와 항쟁파의 갈등 발생

5/25

항쟁지도부 탄생

5/26

계엄군이 재진입하고 있다는 소문 도청에 입수

두 차례의 범시민궐기대회 등 개최

5/27

새벽 계엄군 도청으로 진입해 시민군 소탕작전 시행 

    

  계엄군의 진압으로 시민들의 저항이 강제로 봉합되어버린 27일 직후, 신군부는 군사 재판에서 광주 시민의 저항을 ‘국가의 헌법을 문란하게 한 내란’으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처벌했다. 이 과정에서 총 2,522명이 검거되었고, 훈방 1,906명, 군법회의 회부 616명, 그 가운데 212명이 불기소 처분되었고, 404명이 군사 재판을 받았다. 1981년 3월 31일 대법원은 83명에 대하여 계엄법 위반, 내란주요임무종사, 살인 등의 죄목으로 형을 확정했다. 그러나 형이 확정된 지 3일 만인 4월 3일, 관련자 83명 전원에 대해 특별감형, 특별사면 또는 복권조치가 취해졌다.[3] 


  이 판결은 17년 후, 1997년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은 5‧18이 ‘내란 행위가 아니라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 행위’이며, 다름 아닌 신군부의 광주 시민 학살이 ‘내란’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 판시했다. 동시에 발포 행위에 관련된 책임자였던 보안사령관 전두환, 육군참모차장 황영시, 특전사령관 정호용, 국방부장관 주영복, 계엄사령관 이희성을 ‘내란 목적 살인죄’로 처벌했다. 이는 시민군과의 교전과 사상자 발생이 필연적인 상황에서 작전 감행을 명령한 것은 분명 살상 행위를 지시 내지 용인한 것이라는 판결이자, 계엄군의 작전이 국가권력에 의해 이루어진 폭력임을 법적 언어로 명시한 판결이었다.     



5·18을 둘러싼 담론그 변화의 과정


  사건 발생 당시 광주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국지화와 은폐의 전략이 작동했다.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에 주둔하는 열흘 동안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었으며, 광주 지방 TV 뉴스에서조차 20일, 18일과 19일 ‘소요’로 인해 경미한 피해가 있었고 연행된 176명을 모두 귀가시켰다는 왜곡된 내용만이 겨우 보도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의 폭력 행위는 광주와 인근 호남 지방에서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알음알음 공유될 수 있었다. 최초의 전국 언론 보도는 21일 계엄사령군의 발표로, 계엄사는 “서울을 이탈한 학원 소요 주동 학생 및 깡패 등 현실 불만 세력이 대거 광주로 내려가 사실 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트린 데 기인”[4]한 사건으로 광주에서의 상황을 일축했다. 진압부대의 작전이 막을 내린 27일에는 신군부에서 계엄사령부 명의로 “광주사태”라는 담화를 발표했고, 해당 담화문에서 광주의 열흘은 ‘유언비어’에 의해 순수한 시민들이 선동당하고, ‘무장폭도’들이 난동을 일으킨 ‘사태’로 규정되었다. 도청을 진압한 신군부의 ‘내란’ 판결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오랫동안 사안에 대한 침묵이 요구되었다. 오늘날 5·18 이 민주주의 사회를 가능케 한 현대사의 이정표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5·18을 둘러싼 치열한 담론 투쟁의 성과이다. 


  1983년 말 학원자율화 조치에 따라 부흥한 학생운동권은 5·18을 공적 기억으로 부활시키기 위한 의미화 작업에 착수했다. 1984년 5월 19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은 〈아, 5월이여!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를 발표해 광주에서 투쟁하는 주체인 ‘민중’을 발견해냈고, 이는 국가권력이 생산하고 배포한 ‘폭도론’과 ‘유언비어론’에 대항하는 ‘민중론’의 토대가 되었다. 이듬해인 1985년 〈광주민중항쟁의 현대사적 재조명〉은 최초로 소수 영웅적 인물들의 의거나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이 아닌 ‘민중항쟁’의 형태로 5·18을 재규정했다. 해당 자료는 이미 이전의 운동에 의해 광주의 의식이 성숙된 단계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광주 지역의 경제적 계급적 특수성을 ‘항쟁’의 동력으로 지목한다. 같은 시기에 출판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학술부의 〈5·18민주혁명성 고찰〉 역시, 다소 낭만적인 시각에서 5·18 민중의 혁명적 의식이 이미 ‘충만’해 있었다고 서술한다. 6월 항쟁 이후인 1989년, 이정로는 민중을 ‘순진한’ 피해자로 그려내는 자유주의적 시각에 분개하며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 전환〉으로 5·18의 투쟁의 주역이 노동자계급이라고 노동계와 지식인층을 향해 과감하게 선언한다.


  이처럼 학생운동권, 재야운동권과 노동운동이 양적으로 팽창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 5·18의 해석은 맑시즘적 계급투쟁과 혁명의 논리로 발전했다. 조대엽은 이에 대해 “특정시기의 문화적 모순과 역사적 사건은 집합적 신념을 형성하는 역사적 맥락의 문화적 원천”[5]임을 제시하며, 5·18의 경험이 80년대에 격렬한 민주화운동의 집합적 신념이 형성되는 과정에 핵심적인 동인으로 작용했음을 이야기한다. 광주에서 자행되었던 폭력의 경험은 국가폭력이 일반적으로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탈선을 할 수 있음을 일깨웠고, 사회운동 세력은 정권에 대해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정당성을 습득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국가, 정부, 그리고 군대의 존재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관한 물음을 던지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제기는 실천적인 운동의 확산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당시의 시민들을 민중으로 호명하고 이들의 계급적 맥락에서 투쟁의 동력을 설명하는 이 같은 해석은 1990년대 이후 많은 비판을 마주한다. 가령 사회과학자 최정운은 민중론이 항쟁의 배경으로 지목하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 호남 차별에 대한 불만과 원한, 당시 광주 사회의 경제적 상황과 계급성 등의 타당성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이러한 관점이 광주의 경험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많은 광주 시민들이 투쟁의 첫째 이유로 지목했던 것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담아 폭력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의 진압이 준 충격, 그리고 그로 인해 짓밟힌 ‘인간임’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이후 학자들은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의식을 깨뜨리는 자연적인 것들, 이를테면 죽음, 피, 절규와 눈물 같은 것들 위에서 5·18 당시의 도덕성과 윤리가 일어섰음에 주목한다. 박준상은 “그 자연적인 것들에 비하면, 모든 관념은, 당시에 또한 지금까지 이 사회 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독재 타도’ ‘민주화’ ‘공동체의 이념’ ‘저항과 희생의 정신’과 같은 정치적 도덕적 관념들조차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6]라고 하며, 사회과학적 맥락 이전에 존재했던 ‘몸’을 가진 인간의 윤리를 강조한다.


  “폭력에 대한 공포와 자신에 대한 수치를 이성과 용기로 극복하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시민들이 만나 서로가 진정한 인간임을, 공포를 극복한 용기와 이성 있는 시민임을 인정하고 축하하고 결합한”[7] 이른바 ‘절대공동체’는 오늘날 5·18을 해석하는 중심축 중 하나이다. 시민들의 저항이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처지’였기 때문에 폭력을 묵과할 수 없는 전통적 공동체에서 출발하기는 했으나, 그 과정에서 구성된 절대공동체는 “사유재산도 없고, 생명도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었”으며, “계급도 없”[8]는 곳이었다. 이는 5·18이 결국은 국가폭력에 의해 진압되었음에도 고귀하고 숭고한 승리로 기억될 수 있는 핵심적인 근거이다. 


  한편, 절대공동체론 역시 당시 시민들이 보인 윤리성과 공동체성에 주목하는 어떤 매끄러운 서사를 구축하고자 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김정한은 5·18에서 공유되었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반공’과 ‘자유민주주의’가 있었음을 지적하며, 5·18의 운동적 성질을 사회운동과 달리 우발적이고 일시적이며, 자발적이고 비조직적이며, 장기적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폭발적으로 발생한 후 소멸하는 ‘대중(masses)운동’[9]으로 설명한다. 이는 곧 5·18이라는 저항의 과정에서 참가자들이 서로 다른 동기와 참여의 양태와 감정의 역동을 경유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0년대 이후 증언 및 구술 채록 작업들은 절대공동체론 내부에 포섭되지 않는 기억들을 기록하고, 서사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에 집중해왔다.


  여성의 목소리는 민중과 공동체의 숭고함이 담론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는 과정에서 누락된 주변부 서사 중 하나이다. 주류의 5·18 담론은 특정한 여성의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폭력적으로 진압당한 여성의 신체, 주먹밥을 만들어준 어머니들, 세숫대야에 물을 떠서 나누어준 술집 아가씨들,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가두 방송을 한 여학생… 그러나 당시 광장에는 이외에도 투사회보와 같은 각종 유인물과 대자보 제작, 선전 활동, 시신 수습과 유가족 지원, 싸움을 위해 꾸준히 지속되어야만 했던 식사 준비, 연락과 네트워크 연결, 총기 전달과 도청 사수 등의 보안 관리, 신분증 제작, 재봉, 모금과 물품 조달, 부상자 간호와 치료 행위와 같이 다양한 저항 행위가 존재했다.[10] 강렬한 공동체적 표상을 형성하기 위해 누락되었던 이들의 경험과 증언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5·18을 둘러싼 담론에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오월정신의 선택적 계승과 재현


  5·18이 결코 단일한 성질의 집단이 단일한 목적을 위해 봉기한 사건이 아니듯, ‘오월정신’ 역시 하나의 정신, 또는 의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오월정신은 주먹밥과 피를 나누어 이웃을 도왔던 공동체정신을 의미할 수도, 국가폭력과 그에 대항하는 인간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외침으로 해석할 수도, 국가폭력을 묵인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민족자주성으로도, 민중의 계급투쟁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으며, 앞서 나열된 그 어느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일찍이 박구용은 ‘광주정신’이라 불리는 것이 “광주라는 도시공동체에 내재하는 이념적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만남과 소통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광주시민의 동일화 과정에서 생성된 가상”[11]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진보적 대항 이데올로기는 운동성 내지는 저항성의 획득을 목적으로 특정한 표상과 ‘민중항쟁’이라는 명명 위에서 5·18을 설명해왔으며, ‘오월정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끊임없이 호명되고 있다. 민주노총과 오월봄 순례단의 집회는 이러한 경향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민주노총의 노동자대회를 다룬 보도자료에서 5·18은 “군사독재 총칼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저항의 귀감으로, “노동자, 농민, 학생, 상인, 도시빈민 모두가 함께 싸웠던” 투쟁으로 이야기되었으며, 결의문에서는 10·26 참사와 양회동 열사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살인정권”을 심판하고 끌어내리자는 선언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특히, 김은형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나눔과 연대의 세상을 만들었던 5월 정신이 건설노조 탄압에 맞선 양회동 열사의 피로 이어졌다”고 이야기하며, “민중항쟁의 역사를 계승”[12]할 것을 말했다. 여기서 민주노총이 5·18을 ‘민중항쟁’으로 호명한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삼민주의[13]와 영웅적 투쟁을 강조하는 이같은 명칭은 80년대 중반에 설정된 민중론의 노선을 명백히 계승한다. 이 과정에서 5·18 은 80-90년대의 운동에서 그랬듯이, “부당하게 억압받는 자들의 고통의 상징”[14]이나 “사회의 상층부에 오른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분노의 상징”으로 발화되었다.


  나아가, 5·18이 노동자부터 넝마주이로 대표되는 도시빈민을 포함하여 광주 시민 ‘모두’의 투쟁이었음을 강조하고 이 과정에서 드러났던 나눔과 연대를 부각하는 발화들은 공동체론에 입각하고 있다. 이는 21일 도청 점령 직후부터, 하나인 듯 보였던 시민들 사이에서는 계급적 균열이 드러나는 등 ‘나’와 ‘너’가 존재하는 전통적 공동체의 성질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누락한다. 민주노총이 그려내는 광주라는 공동체에는 이러한 균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광주는 고귀하고 숭고한 연대를 통해 결사항전한 ‘민중’으로 매끄럽게 그려졌으며, 이 숭고한 주체는 노동자대회의 현장에서 현 정권 퇴진을 위한 밑거름이자 퇴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강화하는 근거로 발화되었다. 이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를 위한 집회와 시위의 장소들에서” 광주, 또는 5·18이 “거부와 저항과 비판의 근거로 나타났”[15]던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한편, 오월봄 순례단을 조직한 진보대학생넷의 페이스북에 따르면, 순례단에 참여한 500명이 넘는 대학생, 청년, 청소년은 합동참배식에서 “오월영령들께 열사의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가겠다 약속”하고, 문화제에서는 “오늘날 우리 청년들의 삶이 5·18과 이어져 있다는 것”[16]에 공감하고 실천을 다짐했다. 광주기행에서 돌아온 뒤, 오월봄 순례단에 참여한 단위의 구성원에게 순례단에서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순례단에서의 활동 중 재현 행진과 문화제를 주요 활동으로 언급하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80년 5월 당시의 장면들이 영상이나 공연의 형태로 상연되었음을 지적했다. 


“[문화제]동영상에서 당시의 참혹함을 보여주는데 그때의 사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저는 너무 껄끄럽고 보기 힘들었는데 그러면서 계속 봤죠. 일단은 왠지 안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 오월봄 순례단 참가자 인터뷰 中     


  광주에서 자행된 폭력을 실감나게 재현하고 전달하는 것은 즉각적이고 강렬한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장용주 신부가 독일의 방송자료를 녹화해 한국에 반입하고 1987년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제작하여 배포한 ‘광주 비디오’[17] 〈오월 그날이 오면〉은 실제로 80년대 후반 신군부의 학살을 전국적으로 알리고 6월 항쟁을 일으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5·18에 대한 더욱 복합적인 논의가 가능한 현재, 이에 대한 교육이 은폐와 축소에 맞서 광주의 참사를 알리기 위해 대학 곳곳에 격문들과 사진을 붙이던 1980년대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양태로 반복되고 있다면, 이는 오히려 5·18을 단일한 모습 속에 묶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폭력의 기록들을 ‘안 보면 안 될 것 같’은 감각은 보는 이를 죄책감이나 의무감과 같은 감정으로 밀어 넣는다. 이러한 재현 속에서 그 내부의 복잡한 맥락과 서로 다른 관점은 누락되어, 5·18은 실제로 모색과 탐구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참혹한 사진들과 대자보들과 구호들에 등장하는 상징”[18]에 그치기 마련이다.

     

“차례대로 80년대는 당시 5월 항쟁을 재현하려고 시민군 분장이라든지 아니면 대학생이나 그때 학생 옷. [구호로] 그때 걸렸던 전두환[탄핵]을 걸었고요. 두 번째가 저 있었던 90년대. 그때도 대학생이랑 넥타이 부대가 있었는데 제가 넥타이 부대를 했어요. 그때 걸었던 구호가 미군 물러가라랑 통일이었고. 현대가 이제 윤석열. 이번 단체에서 걸었던 구호, 기조 같은 게 오월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윤석열 퇴진이다, 이거였어서 그렇게 했더라고요.”

- 오월봄 순례단 참가자 인터뷰 中 

    

  민주노총의 노동자대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월봄 순례단의 재현 행진은 궁극적으로 ‘오늘’의 문제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80년대 광주의 재현, 90년대 학생들과 넥타이 부대의 재현, 오늘날의 투쟁 세 집단으로 이어진 금남로에서의 재현 행진은 각 시대의 대표적인 구호를 경유하여 “오월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윤석열 퇴진이다”라는 기조 하에 ‘윤석열 퇴진’이라는 오늘날의 구호로 수렴했다. 오월정신은 다시 한번, 단일하고 명확한 하나의 표상으로, 지금 전남대학교 정문에 모인 ‘우리’가 마주한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한 근거로 발화되었다. 비단 두 단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시기 광주를 찾은 수많은 정당, 시민단체들이 ‘오월정신’을 외친 뒤 곧바로 정치적 구호로 수렴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다른 오월광주를 그리는 일


  오월의 광주를 찾아가는 길의 고민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나에게 오월광주는 가까운 이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금남로 광주극장 뒷골목에 살았던 그는 80년 5월 당시 언제나처럼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고 한다. 깨진 돌이 굴러다니는 금남로를 지나 도착한 학교는 담벼락이 반쯤 무너져 있었다. 엄습하는 두려움에 얼어 있던 그를 학교 맞은편 병원 옥상에서 상황을 살피던 아주머니 한 분이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외쳤다. 집에 돌아가고 일주일여의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에 대한 기억은 파편적이다. 겁도 없이 나돌아다닌다고 아버지께 혼이 났고, 하루쯤 뒤 도청에 나갔던 아버지가 혼비백산이 된 채로 집으로 돌아와 “진짜 쏠 줄 몰랐다”고 중얼거린 것, 그 뒤로 한동안 집 밖에 나가지 못했던 것, 두꺼운 커튼 틈새로 내다본 광주극장의 난간 밑에 사람들이 몸을 다닥다닥 붙인 채 숨어 있고 그 위로는 수색 헬기가 뭔가를 찾아 돌아다니던 모습, 군인들이 청년들을 잡아가서 집에 중국집 오빠들을 숨겨줬던 일, 거리에 깔려 있던 흉흉한 소문들……


  국가폭력은 일상을 깊숙이 침범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은 오월 전후로, 광주에 연고를 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겨우 그 맥을 이을 뿐이다. 5·18의 담론은 총과 칼을 든 국가폭력에 대항한 민중들의 숭고한 투쟁을 중심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2023년의 금남로와 전남대학교 정문에는 1980년 당시의 폭력을 담은 사진과 영상이 의례적으로 전시되었고, 끝까지 도청을 사수했던 이들과 몸을 던져 민주화를 외친 이들의 이름이 수차례 호명되었으며, 5·18 국민대회의 한편에서는 고립 속에서 나눔과 연대를 이룩한 ‘절대공동체’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주먹밥을 나누어 주는 행사가 재현되었다. 5·18은 침묵해야만 했던 암흑기를 거쳐 공적 역사에서 ‘완결된 서사’로서 자리매김했고, 오늘날 실천의 현장은 참혹하면서도 숭고한 몇몇 특징적인 장면들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무엇을 어떻게 재현하는가는 그것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어떤 의미가 선택되고 수용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앞서 살펴본 재현의 양식은 5·18을 현대사의 중심부에 배치시키고 진상규명와 책임자 처벌을 꾸준히 요구해온 민중항쟁이라는 담론이 5·18의 이해에 있어 지배적인 서사를 구축했음을 드러낸다. 민주화를 외치지 않았던, 총을 들지 않았던, 광장에 뛰쳐나가 결사항전하지 않았던 이들의 존재는 이 매끄러운 서사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대중들의 외침은 저마다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의 입에서 말함으로써, 또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터져 나온 것이었다. 이 외침에는 민중으로서의 자기인식이나 응분의 투쟁만큼이나 그것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렇다면 그 시간을 살아낸 (또는 살아내지 못한) 이들을 주변부로 밀어낸 채로 부르짖는 ‘오월정신’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이제껏 주목하지 않았던 위태로운 복잡성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오월광주에서 시민들이 붙잡고자 했던 삶의 끄트머리를 붙잡을 수 있으리라.


[1] 민주노총. “[생중계] 제43주년5·18 민중항쟁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 YouTube, 2023.05.13.,

https://www.youtube.com/watch?v=S3OdKyHdxIA 

[2] 5‧18기념재단. “제2장.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 5‧18기념재단, 

https://518.org/nsub.php?PID=010102. 

[3]  5‧18기념재단. “제3장. 5‧18민주화운동과 유혈 진압.” 5‧18기념재단, 

https://518.org/nsub.php?PID=010103 

[4]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오월의봄, 2012, 44.

[5] 조대엽. 「광주항쟁과80년대의 사회운동문화」. 『민주주의와 인권』. 3권, 1호, 2003, 183.

[6] 김형중·이광호. 엮음. 『무한텍스트로서의 5·18』. 문학과지성사, 2020, 175.

[7] 최정운. 앞의 글, 171-173.

[8] 위의 글, 175.

[9] 김정한. 「5·18 광주항쟁의 이데올로기 연구」. 『기억과 전망』. 18호, 2008, 77.

[10] 김영희. 「‘5·18’ 서사의 표면과 ‘여성’ 구술이 만드는 파열」. 『한국문화연구』. 71집, 2023, 273.

[11] 박구용. 「문화, 인권, 그리고 광주정신」. 『민주주의와 인권』. 7권1호, 2007, 155.

[12] 송승현. “80년5월 광주처럼, 민중의 항쟁으로 윤석열 정권 끌어내리자.” 노동과 세계, 2020.05.15., 

http://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502519 

[13] 민족, 민주, 민중의 세 개념을 유기적 통일체로 인식하고 각각의 투쟁은 단계론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투쟁으로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삼민주의는1985년을 전후하여 학생운동권 및 재야운동권이 공유한 대표적인 패러다임이었다. 최정운. 앞의 글, 70.

[14] 김형중·이광호. 앞의 글, 168.

[15] 김형중·이광호. 앞의 글, 167.

[16] 진보대학생넷. “오월봄 광주 기행 보고 학생넷 회원들은 ‘오월봄 순례단’ 참가자들과 함께5/13-14 광주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페이스북, 2023.05.17., https://www.facebook.com/jbstunet 

[17] 김용희. “1987년6월항쟁 불 댕긴‘광주 비디오’, 어떻게 나왔나.” 한겨레, 2023.06.11.,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95432.html 

[18] 김형중·이광호. 앞의 글,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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