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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9호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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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Mar 08. 2024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편집위원 유연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페미니스트요?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런데 초면에 당황스러운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모두 페미니스트신가요? 저는 일단 그렇긴 한 것 같은데요. ‘일단’과 ‘것 같은데요’가 붙은 이유는, 저는 제가 어떤 페미니스트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의 역사나 계보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저로서는, 페미니즘 책이나 강연록을 읽다 보면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그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있지 뭐예요? 누구는 에코 페미니스트라니, 또 누구는 신유물론자 페미니스트라니, 스스로를 정의하고 의견을 밀어붙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는 ‘일단은’ 페미니스트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제가 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저는 인터넷 친화 페미니스트라는 점이지요. 저와 제 친구들은 다양한 SNS를 활발하게 사용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망설임 없이 구글에 검색합니다. 수많은 정보 사이를 돌아다니며 모르고 있던 부분을 채워 넣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해요. 그중 특히 트위터(현 X)를 통해 다양한 페미니즘 의제와 주장들을 접하고 자신의 주장을 발화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저와 친구들이 인터넷 친화 트위터 페미니스트! 로 정리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하게도 인터넷상의 사람들 또한 모두 같은 의견으로 합치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래의 트윗[1]을 볼까요?

(그림 1 캡션-miri@komiri_study의 트윗(https://twitter.com/komiri_study/status/1687382760812675072)

(그림 2 캡션-갈루아(galois)@galois19c의 트윗(https://twitter.com/galois19c/status/1687695194383339520?t=BQbqlSky7QBSvQ2Q53MaXA&s=19)

(그림 3 캡션-(몬덴킨트KR) 道寭 고양잇과 쉬흘라P@hl970226의 트윗(https://twitter.com/hl970226/status/1685801540219740160)

(그림 4 캡션-SingSong!@SingSon37994661의 트윗(https://twitter.com/SingSon37994661/status/1685935548916252673)


  여러분이 저와 같은 인터넷 친화 페미니스트라면 만났을 수도 있는 트윗이죠! 사실 단순히 안전에 대한 필요를 넘어, ‘여성 전용’에 대한 희망은 항상 있어 왔어요. 그림 1의 트윗에 따르면, 여성만 있는 공간은 “화사함, 욕설 없는 조용함, 요리와 베이킹, 금연”을 약속하죠. 이뿐 아니라 많은 페미니스트가 특정한 여성성에 기반한 여성 연대, 여성 공동체를 꿈꿔 왔어요. 여성 전용 술집, 스터디 카페를 추천하는 글은 조용함, 깔끔함 등의 단어를 포함합니다. 그림 2의 트윗에서 여성 전용의 장점이라고 흔히 말해지는, 어쩌면 여성의 장점이라고 여겨지는 특징들을 명백하게 읽어볼 수 있죠.


  물론 이러한 주장은 많은 반박을 받았습니다. 그림 3의 트윗은 “착하고 무해함”, 즉 위의 두 트윗이 긍정적인 여성성으로 제시한 특징이 사실 여성혐오적인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지적하죠. 앞선 두 트윗의 작성자들이 상상한 ‘안전한 여성 공동체’의 안전함은 여성에게 기대되는 ‘여성적 특징’으로 인해 구현되는데, 그 특징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여성혐오라는 말입니다. 그러며 여성들도 남성의 특징으로 생각되기 쉬운 “비열함과 잔인함”을 탈취해 올 수 있음을 피력합니다. 그런데 맙소사, 또 그림 4가 인용 트윗[2]으로 이를 반박하죠. 그래도 여성의 도덕성은 그 최저선이 “여전히” 남성보다 낫다면서요. 이 대립은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일까요? 트윗에 인용 트윗에 또 인용 트윗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요?


  이런 갈등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지친 많은 사람들은 아예 가치 판단을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네 말도 옳다, 그래 네 말도 옳다 하는 황희 정승이 된 것처럼 말이죠. 또 다른 사람들은 이 트윗이 누구의 것인지, 나나 내 친구가 팔로잉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살피기도 해요. 그리고 평소 이 트윗을 쓴 사람의 관점에 동의해 왔고 이번에도 이 사람 말이 더 적절한 것 같다고 판단하고 넘겨버리기도 하죠. 어쩔 수 없어요, 우리는 너무 바쁘고 인터넷상의 사소한 논의 하나하나를 고민하기엔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부족하니까요. 그런데, 이 여성성에 대한 논의는 정말로 인터넷상의 ‘사소한’ 논의에 불과할까요?


  앤 스니토(Ann Snitow)는 『페미니즘 속의 갈등들』(Conflicts in Feminism)이라는 책에 “젠더 다이어리”(A Gender Diary)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글은 필자인 스니토와 스니토의 친구 A가 한 대화를 재구성하며 시작합니다. 아이를 가진 A는 “이제 나는 여자가 될 수 있고, 그건 더는 부끄럽지 않아. 이제 난 한때 내 수치였던 것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어(Now I can be a woman; it's no longer so humiliating. Now I can value what was once my shame).”라고 말합니다. 이에 스니토는 깜짝 놀라며 아주 반대되는 답을 해요. “이제 나는 더 이상 여자가 될 필요가 없어. 여자가 되는 건 언제나 수치스러웠지만, 나는 탈출구가 없다고 생각하곤 했어. ‘여성’은 내 노예로서의 이름이고, 페미니즘은 내게 다른 정체성을 찾을 자유를 줄 거야(Now I don't have to be a woman anymore. Being a woman has always been humiliating, but I used to assume there was no exit. 'Woman' is my slave name; feminism will give me freedom to seek some other identity altogether).”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여성 인권을 위해 다 함께 싸우는, 상호적으로 단단하게 결속된 집단을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990년에 미국에서 쓰인 이 글은, 페미니즘이 사실 유서 깊은 내부적 갈등의 역사를 지나왔음을 밝힙니다. 스니토는 페미니즘 안에서 갈등하는 갈래들 중 대표적인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구축해서 강력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to build the identity “woman” and give it solid political meaning)”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이라는 바로 그 범주를 허물어뜨리고 너무나 확고한 역사를 해체하는(to tear down the very category “woman” and dismantle its all-too-solid history)” 것입니다.[3]


  쉽게 설명하자면 첫 번째 갈래는 여성성[4]과 관련된 모든 성질과 모습을 긍정적으로 재규정합니다. 본래 경시되던 사랑과 창조, 감성과 양육 같은 여성화된 특징들을 폭력, 차가움, 약탈 등 부정적인 남성성과 대비시켜 여성성의 ‘진짜 가치’를 되찾습니다. 두 번째 갈래는 어떨까요? 그들은 첫 번째 갈래를 비판하며 가부장적 여성상을 부정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현실을 강조하며, 여성을 그러한 여성성에 대한 억압에서 탈출시키고자 합니다. 


  앞서 나열해 놓은 트윗들을 다시 한번 볼까요? 아주 명백하게 특정 갈래로 부착시킬 수는 없어도, ‘여성성’과 그것을 소유한 ‘여성 집단’을 긍정적으로 호명하는 그림 1과 그림 2, 그림 4의 트윗은 첫 번째 갈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죠. 이를 여성혐오적이라고 비판하는 그림 3은 두 번째 갈래고요. 이처럼 넓고 범박하게 나눠놓은 갈래에는 각각 아주 다양한 의견과 세부적인 방향성들이 내부적으로 위치되거나, 가끔은 둘 사이의 교집합에 위치되기도 합니다. 


  스니토는 서구의 페미니즘 계보를 20세기 초반부터 후반까지 훑으며, 움텄다가 저물고 다른 방식으로 계승되기도 한 다양한 주장들을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로 분류하여 자리시킵니다. 이 주장들 중 영향력이 컸던 몇 가지는 한국의 페미니즘이 창발하는 시기에 일부 수입되었어요. 한국의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서구의 페미니즘을 자국의 상황에 대입해 주장을 다듬는 과정에서도 서구의 페미니즘 역사에서와 유사한 갈등이 촉발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1980년대 여성해방운동과 여성문화운동 간의 갈등입니다.


  1980년대는 본격적으로 ‘여성 지식인’과 ‘여학생’이 등장해, 페미니즘이 학술적 언어로 대학 안팎에서 연구되고 구조화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학과인 이화여대 여성학과도 이때 만들어졌어요. 이화여대에서 연구하던 이효재 교수가 본인의 제자들과 함께 여성사연구회를 설립했는데, 이들은 무크지[5]인 『여성』을 발간했습니다. 『여성』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 서구 제2물결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여성해방론을 주장했어요. 


  쉽게 설명하자면 제2물결 페미니즘은 ‘여성’ 또한 정치적 범주이며 여성 억압은 사회구조적으로 생산된다고 주장합니다.[6] 그렇기에 이들의 목표는 여성이 법적⋅사회적으로 ‘평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인데, 이 ‘평등’이라는 단어는 ‘인간화’로 번역되어 한국에 들어왔어요.[7] 여성해방운동은 ‘모성 보호’와 ‘보육 시설’ 등을 요구하며 여성에게 부과되던 재생산 노동을 사회적인 공동 책임으로 바꿀 것을 주장하고, 여성도 사회적 노동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져야 하며, 그리하여 여성과 남성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노동하는 여성과 연대하는 『여성』은 그간 이루어진 여성운동이 지나치게 중산층 중심으로 묶이는 것을 경계하며, 여성해방은 나아가 사회구조 자체를 변혁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여성해방운동은 성차 또한 사회적인 것이기에 성별에 따라 ‘여성’과 ‘남성’의 삶과 일을 구분하기보다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바랍니다. 여러분도 읽으면서 느꼈겠지만, 여성해방운동은 가부장적 여성상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이를 탈피할 것을 주장하는 두 번째 갈래에 놓아볼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여성문화운동은 어떨까요? 『또 하나의 문화』는 대표적인 여성문화운동 갈래의 무크지입니다. 이들은 ‘여성만이’ 보일 수 있는 ‘여성의 가치’가 있으며, 그것으로 여성들이 연대하여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성문화운동과 『또 하나의 문화』 편집위원들은 ‘가정주부’라는 존재에 주목했습니다. 1980년대는 남성 가장이 임금노동을 담당하고 여성 어머니가 가사노동과 돌봄을 담당하는 ‘정상 핵가족’ 구조가 안정적으로 정착한 때예요. 여성해방운동이 가정주부이자 어머니인 여성을 ‘인간’으로 재호명하며 그에게 취업에 있어 평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대비되게, 여성문화운동은 모든 여성이 취업여성이 될 수는 없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며 주부는 주부의 힘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해요.


  여성문화운동에서 주부의 노동은 ‘살림’과 ‘생명’으로 재가치화됩니다. 그들은 남성 중심적으로 이룩된 개발 중심의 한국 사회를 비판합니다. 남성적 가치인 개발과 성장을 우선시하느라 사회는 비인간적으로 변모하였고 인권과 같은 가치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평가해요. 그렇기에 지금껏 가정을 돌봐오고 생명을 길러온 여성들에게 진정 사회를 살릴 힘이 있음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여성문화운동의 논의를 정리하여 조한혜정은 1990년 『또 하나의 문화』 제6호에 「가정과 사회는 여성의 힘으로 되살려질 것인가」라는 글을 썼어요. 그는 가정주부의 노동이 지금껏 부불노동이자 그림자노동이었기 때문에 격하되었던 의미를 다시 부각하고, 여성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주부들이 각자 고립된 영역에 존재하지 말고,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서로 단단히 연대하여 ‘공동체의 살림’을 일궈 나가야 한다고 여성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해요.[8]


  조한혜정은 여전히 동인그룹 ‘또 하나의 문화’ (이하 또문)활동하고 있는데, 2021년에 쓴 글이 또문 홈페이지에 소개글로 걸려있어요. “자매애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문화”는 “남성 인간중심 문명을 넘어”서, “우리들과, 우리들의 다음 세대가, 인류가, 동물과 식물이 어우러진 지구생명체들이 “만물이 서로 돕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적힌 소개글에서는 1980년대의 여성문화운동의 정신이 여전히 계승되어 있음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일관된 여성 정체성에 기반한 여성 연대의 생성과, 여성적 특질의 재가치화를 주요 목표로 삼는 여성문화운동은 첫 번째 갈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죠.    

 

*   

  

  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책과 논문을 읽으며 저는 어디에 설득되는지를 고민해 보았어요. 그러니까, 저는 과연 ‘어떤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지를요. 스니토가 분류한 여러 갈래들 중에서는 후기 구성주의자(poststructuralist)가 마음에 들었답니다. 후기 구성주의자는 “여성”을 만들어진 분류로 보는 동시에, 이를 “계속되는 투쟁이 있어온 담론(a discourse over which there had been an ongoing struggle)”[9]이라고 여깁니다. 이들은 ‘위치성’에 주목하는데, 이때 ‘여성’과 ‘여성성’은 영구하게 일관적인 것이 아니에요. 그 여성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즉 인종과 나이, 계급과 국적, 가족 관계와 소득 수준이 어떠한지, 나아가 어떤 시대에서 살아가는지에 따라 여성에게 요구되는, 그리하여 여성이 취득하거나 내재하게 되는 ‘여성’은 각기 다르게 되는 거죠.


  이러한 주장과 공명하는, 가부장적 여성성을 부정하는 두 번째 갈래에 저는 조금 더 마음이 가는 것 같아요. 범계급적 운동을 펼치는 여성해방운동도 멋진 것 같고요. 그러나 가끔은 첫 번째 갈래의 필요성에도 동감해요.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연대의 힘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는지 몇 번 보았고, 가끔은 그 효과적인 전략이 몹시 절실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성폭력 규탄 집회나 법제화 운동 등은 여성 연대에 기반하는 일이 잦으니까요. 나아가 ‘여성 연대’라는 개념이 페미니즘 운동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제게 끌리는 것이긴 해요. 저의 많은 친구들은 여자고, 여자인 친구들과 여자로 사는 경험을 얘기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건 분명 즐겁거든요. 또 그런 감정이 다시 저를 페미니즘으로 이끌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이때 누군가가 ‘단일한 여성’에서 묻히고 탈락될 가능성을 생각하면 무섭기도 해요. 거주지나 사회경계적 계급과 같은 요소들이 ‘단일한’ 여성 집단을 불가하게 하는데도 어떤 ‘단일함’이 결성된다면 그것은 어떤 여성을 보편 기준 삼은 것일 텐데, 이때 또다시 보편 여성에 미달하는 여성들ー이를테면 빈곤한 여성, 집이 없는 여성, 농촌으로 이주해온 여성 등一이 조명받지 못할까 봐 무서워요. 또는 여성 아닌 퀴어가 페미니즘 연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거나, 페미니즘의 이름을 두른 혐오로 인해 공격받을까 봐 무섭기도 해요. 이번 호에 실린 '여기, 그대로, 애매하게'에서도 퀴어 페미니스트의 목소리와 존재가 어떻게 ‘페미니즘’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적으로 진압당할 수 있는지 읽어볼 수 있듯이요.


  이 글에서는 20세기 서구/미국 페미니즘 속 갈등하는 갈래들과 1980년대 한국에서 대립했던 페미니즘 분파, 그리고 현재 한국의 트위터상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페미니즘적 논쟁, 이렇게 공간도 시간도 다른 세 곳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을 살펴보았어요. 페미니즘 속에서도 갈등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 갈등을 마주했을 때 저는 몹시 혼란스러웠어요. 도대체 뭐가 정답이지? 어느 쪽이 맞아? 여전히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그게 어떤 페미니스트인지 모르겠어요. 


  이 글을 처음 기획했을 때, 두꺼운 개론서와 멋진 글들을 가득 읽으면 제가 택할 ‘입장’을 확실히 정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으나, 얻은 결론은 역시 ‘완전 정답 없음’입니다. 이제 와선 당연하게도 느껴지네요. 아무것도 틀리지 않은 답이 있었다면 똑똑한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서구에서든 한국에서든 이렇게나 오래 논쟁하지 않았겠죠?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얻게 됩니다. ‘어떤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 답을 찾아보기 전에, 여기까지 읽어준 여러분에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요.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더 공감했나요? 무엇이 더 합리적이거나 효과적인 얘기 같아요? 잠깐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여러분이 읽으며 조금 더 공감한 의견과 제가 공감한 의견은 다를 수 있고, 여러분의 친구, 혹은 선배와 동료가 더 공감한 의견은 다를 수도 있죠. 이때 유혹은 우리를 뒤흔듭니다. 앞서 살펴봤듯 세상엔 이렇게나 다양한 갈래들이 있고, 무엇이 백 퍼센트 맞는 건 불가능해요. 그런데도 하나의 갈래를 택해 그것을 나의 입장으로 취함으로써 어떤 공동체에 완전히 속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쉽고 매력적입니다. 우리의 의견을 곧 나의 의견으로 하고, 우리 아닌 의견을 곧 나의 의견이 아닌 것으로 하고 싶어져요. 나는 ‘어떤 페미니스트’인데 내 친구들, 나보다 더 많이 공부한 사람들, 내가 팔로잉하고 있는 목록도 나랑 ‘같은 진영’이니까 무엇을 주제로든 논쟁이 발생했을 때 그들이 하는 말이 맞는 말이겠지, 하고 넘어가고 싶어져요.


  그러나 항상 ‘어떤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면 그건 항상 무언가를 놓치고 사는 삶이 될 거예요. ‘첫 번째 갈래 페미니스트’가 된다면 퀴어나 여성 아닌 존재를 탈락시킬 수도 있겠고, 인종 혹은 계급 같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지워서 여성 집단 내에서 보편 여성이라고 여겨지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누군가는 혐오당하기 쉬운 상황에 놓이게 될 겁니다. ‘두 번째 갈래 페미니스트’가 된다면 가부장적 여성성을 체현하고 살아가는 여성들을 배제하거나 격하할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방식으로 퀴어를 탈락시킬 수도 있겠죠.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엔 항상 옳지 않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엔 다 적지 못한, 두 갈래 중 하나에 포함되거나 포함되지 않을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진영들이 제각기 다른 배제와 탈락과 혐오의 위험성, 즉 부족함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이 글은 함께 고민해 보기 위해 쓰였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단일한 계보 혹은 흐름에 갇혀있을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매 사안별로, 의제별로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의견과 방안은 다를 수 있어요. 내가 속한 진영의 의견이 곧 나의 의견은 아니니까요. 우리는 어느 때엔 여성문화운동의 입장에 기반하여 돌봄 의제에 의견을 낼 수도 있고, 후기 구성주의자의 입장에 기반하여 여성 노동자에게 연대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어떤 페미니스트’ 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덜 공부해서, 덜 활동해서 아직 확고하게 자신을 특정 이름으로 정의내리지 못했다는 불안감 없이요. 


  우리는 앞으로도 많은 논쟁과 갈등을 마주할 거예요. 학교 수업에서든 트위터에서든 다른 SNS에서든, 혹은 뉴스 기사나 칼럼에서도요. 우리가 어떤 이름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가 어떤 의견이든 매번 달리할 수 있다는 뜻이 될 거예요. 나의 의견이 내가 의지하는 진영과 차이가 있더라도, 같은 사안을 마주한 친구나 선배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두려워 마세요. 때로는 잦고 반복되는 논쟁에 지쳐 스스로 판단하기를 포기하고 의견을 의탁하고 싶더라도, 고민하기를 포기하지 마세요.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분명 ‘최선을 다한 페미니스트’가 될 거니까요.     


[1] 트위터의 게시글을 이르는 단어.

[2] 다른 사람이 쓴 트윗을 인용해서 본인의 트윗을 쓸 수 있게 하는 기능. 인용 기능을 사용하면 타인의 트윗과 나의 트윗을 한 트윗에 넣고 볼 수 있어요!

[3] Snitow, Ann. “A Gender Diary.” Conflicts in Feminism, edited by M. Hirsch and E. Fox Keller, Routledge, 1990, pp. 9.

[4] 여기서 잠깐! 그럼 첫 번째 갈래는 여성성(이라고 사회·역사적으로 여겨진 것)이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여성의 특성이라고 여길까요? 뒤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초기 페미니즘의 경우 그렇게 주장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현재에 와선 첫 번째 갈래의 페미니스트들도 여성성이 상상된 환상, 사회적으로 구성된 이미지임을 인정하는 때가 잦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여성성’과 ‘여성’의 관계를 어떻게 짚어낼까요? 질리언 로즈는 『페미니즘과 지리학』이라는 책에서 되프의 글을 인용합니다. 되프에 따르면 (‘여성성’을 완전히 가졌다고 상상되는) 환상 속 여성과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 여성은 서로 상관없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시를 들어 볼까요? 아름다운 연예인, 광고 속의 여성 배우들은 계속해서 ‘환상’을 생산합니다. 그 환상은 보통 여성이 그러한 모습을 닮게끔 만들죠. 또 보통 여성들 또한 환상을 유지하거나 구상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며 이들은 계속해서 상호작용합니다. 그렇기에 보통 여성에게 ‘여성성’이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며, 첫 번째의 페미니스트는 그것의 진짜 힘을 되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제 윗글을 마저 읽어볼까요? 

[5] 무크지란 매거진과 북의 합성어로, 잡지의 성격과 책의 성격을 모두 가진 학술적 부정기간행물을 통칭하는 말이에요. 그 내용은 문학 작품부터 번역물, 소논문까지 다양했는데 1980년대부터 90년대 사이, 대학 안팎의 연구회나 공부 모임 등에서 주로 발간하여 한국 학술장의 큰 부분을 차지했어요. 이 글에서 소개하는 무크지 『여성』과 『또 하나의 문화』는 당시 페미니즘 공론장을 이끌어나갔고, 이들은 각각 『페미니즘연구』라는 학술지와 ‘또 하나의 문화’라는 여성운동단체로 계승되어 현재도 활발히 페미니즘 운동을 펼치고 있답니다. 비록 이들의 글은 40년 전의 페미니즘 논의이지만 전범 없는 운동은 가능할 수 없기에 여전히 현재의 페미니즘 지평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요,

여담이지만, 이 글이 실린 『문우』라는 교지도 넓게 보면 일종의 무크지랍니다! 실제로 1980년대에 발간된 『문우』에선 편집위원들이 외국 논문이나 소설을 번역한 글이나 그들 자신이 쓴 소논문을 많이 찾아볼 수 있어요.

[6] 로즈마리 퍼트넘 통, 티나 페르난디스 보츠.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김동진 옮김, 학이시습, 2019, 58쪽. 해당 책은 서구 페미니즘의 이론들을 시대별로 정리하며 주장들 간 갈등을 소개하고, 각 장의 마지막엔 생각해 볼 질문들도 달아놓았어요. 이 글을 읽고 더 자세하고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들이 궁금해졌다면 해당 책을 읽어봐도 좋고, 친구들과 함께 독서 모임을 해도 재미있을 거예요!

[7] 허윤. 「1980년대 여성해방운동과 번역의 역설」. 『여성문학연구』 제28권, 2012, 241.

[8] 김영선. 「1980년대 여성운동의 새로운 여성 주체 기획과 주부운동론」. 『여성과 역사』 제28권, 2018, 241-266.

[9] Snitow, Ann(1990). 앞의 글, pp. 18.


참고문헌

Snitow, Ann. “A Gender Diary.” Conflicts in Feminism, edited by M. Hirsch and E. Fox Keller, Routledge, 1990.

로즈마리 퍼트넘 통・티나 페르난디스 보츠.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김동진 옮김, 학이시습, 2019.

질리언 로즈. 『페미니즘과 지리학』. 정현주 옮김, 한길사, 2011.

김영선. 「1980년대 여성운동의 새로운 여성 주체 기획과 주부운동론」. 『여성과 역사』 제28권, 2018.

허윤. 「1980년대 여성해방운동과 번역의 역설」. 『여성문학연구』 제28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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