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4
그녀의 행복을 바라는 이유는 나를 믿어 주었던 고마움을 뒤늦게라도 봄기운을 빌려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도 나와 같이 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느끼며 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증권회사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고객 중 한 분이 생각난다. 그녀는 항상 단아한 옷차림과 과하지 않은 화장 그리고 웃음 띤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아왔다. 잘 사는 편도 아니지만 그렇게 못 사는 편도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이 회사에 다니는 동안 재테크를 통해 재산을 늘리고 싶어 했다. 나는 그녀에게 금융상품을 권유할 때마다 누구보다도 신중하였다. 그 이유는 그녀가 나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 주었고 나의 권유를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믿는 사람에게 도저히 나의 이익을 내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늘 수익은 높지 않지만 안전한 자산을 권유하였다. 다행히 수익은 생각보다 많이 발생하였고 그녀의 자산도 무럭무럭 자랐다.
그녀의 작은 가방에서 꼬깃꼬깃 접힌 돈들이 나오면 그것을 적립식 펀드에 넣어주곤 했었다. 구김살 없고 해맑은 그녀의 표정은 돈에 찌든 내 모습을 정화했다.
어느 날 항상 밝았던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예치했던 돈을 모두 찾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남편이 몸이 안 좋아서 더 이상 회사에 다닐 수 없다고 했다. 내 마음은 찾아갈 그녀의 돈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어두워진 얼굴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가끔 같이 왔던 그녀의 귀엽고 작은아들이 떠올랐다. 한 집에 가장이 더 이상 생계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과 오직 가장만을 바라보며 알뜰살뜰 살아온 그녀의 순수(純粹)가 위태롭게 보였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녀의 남편은 40대 중후반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젊은 나이에 시련을 겪은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이 화창한 봄날에 궁금하다. 그들이 이 아름다운 봄날을 만끽하며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그녀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녀의 남편 그리고 그 귀여운 꼬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세상은 우리에게 같은 모습과 같은 색깔로 찾아오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형형색색(形形色色)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각자의 생각과 처지에서 바라본 세상은 항상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오늘 그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그려 나가고 있을까?
생각과 처지가 바뀌면 세상이 달리 보이고 그 다름을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진리의 단어로 포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여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다. 진짜로 삶의 고통에 쫓기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虛像)에 쫓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언제부턴가 사람들과 얘기할 때면 그 사람의 처지를 살피고 너무 과하지도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세상을 묘사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나를 믿었던 그녀가 이 세상은 아름답다고 느끼며 살았기를 희망해 본다. 그녀의 해맑은 얼굴이 어딘가에서 세월과 함께 곱게 늙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