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하루에 소주두병씩을 꼭 먹어야지 잠에 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뜬금포로 찾아오는 공황장애에 고통이 그러했지만 술을 먹지 않으면 잠이 안 왔다.
술을 마시고 감정이 터지면 회사 사람들에게 길고 긴 카톡을 보내 내 심정을 토로하는 경우가 한 달에 한 번꼴로 발생했고, 다음날 얼굴보기 민망해서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인 날도 있었다. 정말 그렇게 하면 안 됐다.
공황장애와 왜 술을 연관 짓느냐 한다면, 잠을 못 자면 어느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지 30분 이내로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공황장애가 찾아오면 심장은 진짜 터질 거처럼 빨리 뛰고, 얼굴은 시뻘게지고 귀에선 엄청 큰 사이렌 소리-이명이 들리고 내 마음을 진짜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심장은 뛰고 그 심장박동수에 따라 내 온몸에 모든 혈관들이 그 빠른 심장박동에 맞춰 두근거리는데 진짜 이러다가 내 몸이 이러다가 진짜 뻥 소리를 내며 마치 킹스맨 1에서 신경칩을 이식한 사람들의 머리가 뻥! 하고 터지는데 내 몸도 정말 그렇게 뻥! 터질 거 같은 공포감이 들었다. 이 느낌이 싫어 나는 빨리 잠들기를 선택했고 빨리 잠들기 위해선 술이 최고였다.
짧게는 몇 분~길게는 한두 시간 그런 느낌과 고군분투를 하고 나면 온몸에 진이 쭉 빠져 버리는데, 그 몸상태로 어떻게든 일어나 다시 또 생계를 이어 나가야 하는 부담감에 스트레스는 가중되고 가중되고. 그렇게 몇 달에 한 번꼴이었던 공황의 주기가 점점 짧아져 오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의 극렬한 공황발작은 회사였다. 퇴사를 결심하고 퇴사 절차를 밟는 와중에 내가 가장 크게 마음이 쓰였던 건 회사의 PC였다. 벌써 10여 년 이상을 써왔고, 이미 노후화가 진행된 상태. USB 삽입하는 단자는 어떻게 하다 그렇게 됐는지 녹이 슬어 있고, 운이 좋으면 한방에 인식이 되지만 운이 나쁘면 인식될 때까지 뺏다 꽂았다를 반복해야 한다.
하드와 SSD의 노후화가 진행된 지 아주 오래라 가끔 하드나 SSD를 인식하지 못해 부팅화면이 바이오스셋업 화면으로 전환되어 거기서 다시 수동으로 전환해 줘야지만 그래야지 다시 부팅이 되는? 그 상태로 계속 PC를 쓰다가 망가져 버리게 되면 수십 년간 쌓인 거래내역도 그러하지만 PC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인 사람들에게 그걸 다 얹어 놓고 가기가 너무 미안하고 걱정이 됐다. (사실 이걸 내가 걱정할 건 아니었다.)
결국 야심 차게 PC를 바꾸자고 제안했고, 몇 차례 설왕설래 오고 가고 견적을 뽑았다 내렸다 뽑았다 내렸다 몇 번을 하면서 나름 준수하게 사장님 결재를 받아 새 PC가 오는 날. 평소엔 조용한 날을 잡아 PC를 조립하고 설치했지만 하필 또 그날은 이상하게 바빴고? 일은 일대로 밀려있는 상황이었다.
사장님은 정을 많이 준 직원이 하루아침에 그만둔다니 괘씸하시기도 하셔서 계속 토라져 계셨고. 진땀은 있는 대로 쭉쭉 나는데, 어떻게 어떻게 컴퓨터를 연결하고 기존 컴퓨터에서 미리 복사해 온 데이터를 옮겨와 회사 erp 프로그램을 딱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빈화면이 덩그러니 나를 반길 뿐이었다. ERP 프로그램 회사에 전화해서 새 컴퓨터로 데이터를 옮겼는데 아무것도 뜨지 않아요! 매뉴얼을 보면 데이터를 옮기는 방법이 있으니 그걸 보라 그러는데, 그게 어디 있는지 모르니 또 어디냐고 물어봐야 하고, 또 원격을 하려면 3만 원을 내라 그러고 아주 미쳐버리겠는 거다.
또 뒤에선 프린터물이 나오니 안 나오니 징징징 징징거리고(딱 세 걸음만 걸어서 자기가 확인하면 될걸 종이가 있네 없네.. 그때로 돌아간다면 진짜, 주먹으로 그 입주댕이를 쳐 버렸을 거다) 순간 귀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동안 귀를 막고 있었다. 전화는 계속 걸려오지 일거리는 계속 집어던져지는데 전산은 멍청이가 되어 있고, 하루아침에 내가 데이터를 다 날려버렸구나. 이걸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하지?
정신을 다 잡고 다시 매뉴얼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자 그 매뉴얼 구석에 데이터를 이전하는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한 내용이 진짜 종이 귀퉁이에 진짜 깨알만 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행여 하나 하는 마음에 그 방법을 취하자 복구 됐다! 복구됐어! 신이 나서 의자에서 펄쩍 뛰어내려 앉았다.
하여간 중간에 일은 너무 많았지만 나는 이렇게 결국 퇴사를 했고, 당장 무엇보다도 내 케어가 우선이었다. 일단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은 너무 무료하고 재미없어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날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에 브런치에 문을 두드린 계기가 뭐 말도 안 되는 주제로 글을 썼다가 2전 2패를 당하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싸움의 순간-그 순간은 퇴사를 준비하는 나의 마음을 정리하며 쓴 글로 합격통보를 받았는데, 퇴사를 준비하며 마음은 있는 대로 망가지는 거 같았고 그 순간을 다시 복기하기가 마음적으로 어려워 지금 내 브런치는 산으로 가는 중이다.
산으로 가면 산에서 살면 되고 바다로 가면 바다에서 살면 되지 하는 가볍고 후련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는데, 지금 나는 내 케어를 하고 있다. 속에 있는 응어리들을 이렇게 한 꺼풀 한 꺼풀 녹여내면서 말이다. 매일같이 하루에 두병씩 먹던 술을 드디어 익절 할 수 있게 된 건 이 사람의 이 말이었다.
내가 매일처럼 술을 먹고 온갖 악담을 다 퍼붓고 그 와중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몇 년간 내 옆을 꿋꿋이 지켜주는 내 남자친구. 몇 번을 내 바닥을 다 보여줬는데도 불구하고, 내 옆을 지켜준 이 사람이 나의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줬다.
날 믿어준다는 사람이 있으니,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온갖 행패와 온갖 난동을 다 부려도 그 와중에 오롯이 내 옆에서 내편이 되어주니 이 사람에게 감사해서라도 더 이상 술을 못 마실 거 같았다. 마시면 정말 이 사람의 마음을 배신하는 거 같아서. (사실 며칠 전 유혹에 넘어간 적이 있었는데.. 첫 번째 고비는 잘 넘겼다가 두 번째 고비에서 넘어져서 딱 두 병 마셨다.)
오늘 재활용 봉투를 들고 내려가며, 이렇게 말해주는데 나도 정말 고마운 마음뿐이다. 그래서 나는 술에서 드디어 익절 할 수 있게 된 거 같다. 술이 주는 몽롱한 기분과 쾌락보다는 술에서 얻을 수 없는 평온함과 멀쩡한 정신으로 내 마음을 오롯이 풀어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더 좋아졌고 이 공간을 다시 얻음과 동시에 내 속에서 잔잔하게 울리는 평화는 주기적으로 찾아왔어야 할 공황도 이제 조금 강도가 낮아지고, 그리고 짧게 지나가 버린다.
앞으로도 이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오늘의 기록을 남긴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에게서 받을 상처, 괴로움을 다른 무엇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장소와 그리고 방법을 찾았으니 앞으로 나는 이 공간을 예쁘게 그리고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을 항상 든든히 지켜주는 이 사람게서 언젠간 이 공간을 지키는 주도권을 뺏어오고야 말 것이야! 왜냐면 이 공간은 원랜 내가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멀고 먼 그리고 또 몇 번을 더 넘어지고 그러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다시 털고 일어나 뚜벅뚜벅 걸을 것이다.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그리고 날 믿어주는 이 사람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