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이다. 화요일부터 주문해서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 내 밭두렁이 오는 날.
어릴 때 우리 집은 엄청 가난했다. 자식들도 많지. 아버지벌이도 시원찮으시고, 어머니가 일을 나가신다곤 하시는데 그건 또 그거대로 자식들 밑으로 들어가 버리니 항상 살림은 고만고만했고, 지갑사정은 쪼달렸고, 항상 부모님 당신들의 삶은 퍽퍽했다.
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받지 못하는 원망이 컸던 어린 시절, 나는 소소한 반항도 해보고 나름 서러움을 꼭 참기도 하며 무난하고, 잠잠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런 내가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게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밭두렁 저 녀석을 한 줌 집어 한번에 한입에 다 털어 넣어 보는 것.
매번 등교 하교 시간에 친구들이 문방구에 들러서 2봉에 100 원주고 저 녀석을 사면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봉지를 챡 뜯어 한입에 탈탈 털어놓고 우물 거렸다. 돈이 없는 나는 뭐.. 내심 부럽고 맛도 궁금해서 한 입만 달라고 해볼 법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러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뭔가 어린 내 마음에 비굴함 같은 것도 느껴져서 그래서 못 본 척, 나는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리기도 했었다.
어쩌다 용돈을 조금 받게 되면, 대부분 뺏겼지만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면 엄마 모르게 동전을 몇 개씩 주시곤 하셨다. 가난한 살림을 이미 어린 나이에 빠삭하게 인지한 터라 지우개 사달란 말을 못 하고 연필 사달란 말은 못 하고 그래서 가끔 주시는 용돈을 모아 지우개도 사고 연필도 사곤 했었다.
어느 날 용기가 났다. 나도 저 밭두렁을 한번 사 먹어보자. 다음에 할머니가 오시면 그리고 나에게 몇 개 동전을 주시면 꼭! 저걸 갖다 사 먹어 보자. 정말 오랜만에 할머니가 오셨고 평소와 다름없이 가방 싸들고 학교 가려는 날 엄마 몰래 부르시곤 내 주머니에 오백 원짜리 하나를 넣어주셨다.
그날, 밭두렁을 처음 사 먹은 날. 사백 원의 거스름돈과 밭두렁 두봉에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두둑한 주머니만큼 밥을 한 서너 공기 먹은 거처럼 배가 불렀다.
형제자매 있는데서 이걸 꺼내놨다간 얼마 없는 동전도 당장에 다 뺏기고 부모님한테 고자질해서 혼날게 뻔한 상황. 나는 형제자매 모두 잠든 시간을 틈타 이불속에서 주머니 안에 있는 봉지를 뿌시럭거리며 살금살금 꺼내 슬쩍 봉지를 트고, 몰래 한알씩 몰래 꺼내 소중히 입안에 넣고 침으로 녹여 먹는 그 맛은 일품이었다.
그 행복도 잠시, 자는 척을 하고 있던 동생에게 발각됐는데, 조금 줄 테니 입을 닫아 달란 거래제안을 해볼 법도 한데, 어린 나는 그런 제안을 할 만큼 약아빠지지 못했다. 당장 쫓아가 엄마에게 고자질을 했고, 내 용돈과 짤랑거리던 몇 개의 동전은 모조리 뺏기고 또 저 얼마 안 되는 과자도 모조리 뺏겼다.
언젠가 내가 어른이 돼서 큰돈을 벌게 되면 저 녀석을 꼭 한 박스를 사서 내가 원 없이 저걸 즐겨보리라 후를 기약하며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엊그제 우연히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다가 이 영상을 접하게 됐다. 문득 어린 날의 추억이 떠올라서 질렀다! 40개들이 한 박스!
한 봉지 앞뒤 생각 안 하고 북 찢어 한입에 툭 털어 넣고 우물우물하는 이 기분은 진짜 째진다. 단짠단짠 한 양념의 맛도 그러하지만 오독오독 다소 딱딱한 식감, 구수한 옥수수의 맛은 아 정말 그때와 다름없이 일품이다.
강산이 변해도 벌써 2번은 넘게 변했고, 백 원짜리 두봉에 잠시나마 행복해하던 꼬맹이가 이제 내일모레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변하지 않은 건 밭두렁의 맛이 아닌가 싶다.
할머니 생각이 문득 났다. 연년생자식을 둔 부모님, 내 위에 바로 막 돌을 지난 언니, 거기다 날 낳으시고 얼마 있지 않아 동생을 가지셔서 어머니는 유달리 힘들어 하셧다. 그래서 이제 채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 나는 할머니손에서 자랄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달리 날 좋아하시고 애정하셨던 우리 할머니. 나 역시도 그런 할머니를 정말 좋아하고 사랑했다. 부모님 보다 더. 가시는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막심한 둘째 손녀는 이제 장성하여 내 밥값하고 살고 있다. 언젠간 나도 때가 되어 할머니가 계신 하늘나라 가게 되면, 못다 한 효도 그때는 꼭 해보고 싶다.
밭두렁 박스는 내 책상 아래 한편에 고이 모셔져 있다. 입이 심심한 날, 맥주가 괜스레 당기는 날 이제는 아주 당당하게 꺼내 한 봉씩 뜯어먹으며 어린 날의 나와 할머니를 추억하겠지.
추억 속을 돌아다니다 상처 많고 여린 꼬맹이를 만나게 되면, 그땐 그 꼬맹이를 꼭 안아줘야지. 뺏겼어도 걱정하지 말고 서러워하지 마라고, 넌 어른 돼서 이거 박스채 쟁여 놓고 먹고 있다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살고 있으니 때론 버티고 때론 흘리기도 하며 너는 너만의 길을 가라고. 그땐 못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고. 꼭 토닥토닥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