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질문
어느덧 다섯 번째 질문이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는 법이고, 매거진과 다르게 브런치북은 완결을 내야 한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찾는 마음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그럼 무엇을 신호로 이 여정에 끝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 본다.
질문을 받아야 답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여정의 모든 것은 질문에 달려 있다. 생성형 AI가 더 이상 새롭지 않고 비슷한 질문만 하거나 흥미를 끄는 질문이 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신호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부디 다섯 번째 질문이 끝이 아니길 바라며 질문 프롬프트를 입력했다.
ChatGPT 4o
1. 창작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할 때, 서로의 이름이나 배경을 모르는 상태에서 교감을 형성한다면, 이런 소통 방식이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예술을 통해 잠시 만나고 사라지는 관계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짧고 순간적인 만남들이 인생에서 어떤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3. 언어 외의 매체를 통해 소통하는 경험이 당신에게 새로운 감정을 깨닫게 해 줬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표현된 감정과 비언어적 표현 사이에 당신은 어떤 근본적인 차이를 느끼나요?
4. 창작과 예술이 외부 장벽을 허물고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을 창작물 속에서 진정으로 드러냈다고 느낄 때, 그 창작물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일까요, 아니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만들어진 결과물일까요?
5. 당신은 예술을 놀이처럼 가볍게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예술을 진지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볍게 접근하는 예술과 진지하게 접근하는 예술의 차이는 무엇이며,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예술의 가치를 다르게 만들어낼까요?
질문에 7화 [창작과 예술을 통한 소통의 특별함] 내용이 상당히 강하게 반영됐다. 매번 질문을 보면서 느끼지만, 생성형 AI만의 관점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이미지를 생성하면 괴랄한 결과가 많이 나오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텍스트는 온건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만큼 텍스트 처리에 익숙해서 인간과 비슷하기 때문일까.
ChatGPT 4o
예술을 통해 잠시 만나고 사라지는 관계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짧고 순간적인 만남들이 인생에서 어떤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사회과학 분야에서 유명한 논문 중에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가 1973년에 쓴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이 있다.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출간된 <낯선 사람 효과>도 비슷한 내용으로 알고 있다. 가깝고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보다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훨씬 더 유용한 새로운 기회나 정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나 또한 살면서 그런 경험을 굉장히 많이 했다. 인생에 큰 계기를 준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라 한번 만났거나 짧은 시기를 함께 한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디 좋은 영향이었기를.
내 독서 경험에 가장 큰 혁신적인 영향을 준 것은 일회성 독서 모임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이북에서 '음성지원' 기능을 써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예 그 기능은 존재감 자체가 없었다. 제공할 수 있으니까 만들어 놓은 기능이라는 느낌이었다.
모든 전자책은 TTS 기능을 제공한다. 그러나 아무리 자연스럽게 읽는다고 해도 아직은 기계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독서란 당연히 텍스트를 읽는 것이라 생각했고, 눈으로 글자를 읽는 게 훨씬 더 빠르다. 그래서 처음 음성지원 기능을 켜본 이후 독서 모임에서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그 기능을 써본 적이 없었다.
그 사람은 원래 책을 잘 읽지 않다가 이제부터라도 책을 열심히 읽어보고 싶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책을 안 읽었다 보니 책 읽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더란다. 그래서 음성지원 기능을 켜놓고 귀로 들으면서 눈으로 글자를 따라가고서야 겨우 한 권을 다 읽게 됐다며 조금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당시 나는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직장 생활로 인해서 뇌가 지쳐 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정제된 정보를 받아들이기에는 집중할만한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모임에서 그 사람 말을 듣고 다음 날부터 당장 음성지원 기능을 켜기 시작했다. 그 뒤로 독서 시간은 놀랍도록 늘어났다.
출퇴근길에 사람들 틈에서 애써 폰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됐고, 듣기만 하면 되니 음량을 키우면 샤워하면서도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조금 집중력이 떨어져도 어쨌든 내용은 진행되니 전체적인 내용은 파악할 수 있었다. 집중해서 읽는 것보다는 못해도 안 읽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 된 것이다. 그 뒤로 그 사람을 다시 볼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영향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7화 [창작과 예술을 통한 소통의 특별함]에서 언급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몇 년씩 알고 지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3개월 미만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과 하지 않았던 깊고 밀도 있는 대화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낯선 사람인데도 교점이 생길만한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일까.
브런치 작가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피드에서 모르는 사람이 브런치 작가로 등록됐다는 것을 보고 지원했다. 그전까지는 브런치를 이용하지도 않았고 작가에 등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누군가로 인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새로운 시도는 늘 낯선 누군가로부터 시작됐다.
최근엔 알고리즘에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알고리즘으로 뜬 영상에서 영감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런 경우 채널 구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이 또 신기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가보지 못한 곳에 가보고,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ChatGPT 4o
짧고 일회성으로 끝난 관계나 만남이 인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상은 흥미롭습니다. 이 현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방식, 습관, 심지어 삶의 방향에까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약한 연결"로서, 가까운 사람들과의 강한 유대관계보다 더 예측 불가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마크 그라노베터의 <약한 연결의 힘> 이론처럼, 우리는 때때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더 큰 기회나 혁신을 얻게 됩니다.
일회성 관계는 지속적인 인간관계처럼 깊은 유대감을 동반하지는 않지만, 그 관계가 가지는 '순간의 강렬함'이 큰 변화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음성지원 기능을 제안한 그 사람의 말은 당신에게 그저 한 번의 조언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독서 습관의 커다란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짧고 일회적인 만남이 종종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낯선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가 기존의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이나 관점을 수용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만남은 가깝고 오래된 관계에서는 오히려 얻기 힘든 종류의 충격과 영감을 제공합니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동반하지만, 이와 반대로 짧은 만남이나 약한 연결은 우리가 그 순간에 얼마나 개방적이냐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우리는 더 예민해지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에, 변화의 순간이 될 확률이 더 높아집니다.
이처럼 일회성 관계가 인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그 만남이 우리의 삶에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낯선 환경을 기꺼이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순간에 얼마나 열려 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짧은 교류에서 발생한 변화는 작은 씨앗처럼 우리의 삶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고, 이는 우리 스스로도 미처 인식하지 못한 방식으로 오랫동안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대단한 팁을 알려주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모임에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어쩌다 나온 말이고, 사실 본인은 음성지원 기능을 쓴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하기도 했다. 혼자 힘으로 책을 읽지 못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에 스스로 조금 한심하다고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다른 사람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라도 책을 읽고자 하는 그의 의지에 감탄했다. 사실 그 말을 하기 전까진 그에 대한 인상은 오히려 별로 좋지 못했다. 사람이 가벼워 보이기도 했고 왜 모임에 나왔는지 모르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던 거 같다.
원래 같으면 만날 일 없을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게 작은 씨앗을 주고 흩어진다고 생각하니, 조금 낭만적으로 들린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우연히 보고 내가 건낸 씨앗을 받는 일도 있을지 모른다. 끝내 내가 볼 일이 없을지라도, 부디 낯선 이가 아름다운 자기만의 꽃을 틔워내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