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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완희 Mar 09. 2024

6화 진라면의 진가(眞價)를 알았지.

라면맛집 '영남알프스 간월재'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문경새재 길을 걷고 온 지 2주도 채 되지 않아,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의 머릿속에는 온통 걷는 것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걸으며 쉴 새 없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던 내 마음속의 여러 감정들이 떠올랐다. 힘들었지만 해냈다는 성취감도 들었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들었던 긍정적인 나의 생각들까지, 물론 고행의 쓴 맛도 보았지만 말이다.

나는 누구보다 산을 오르는 것과 걷는 것을 많이 힘들어한다. 무리해서 걷고 난 이후에는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서 며칠 앓아눕기도 하는 나인데, 왜 그렇게 내 몸을 혹사시켜 가며 걷고 싶었는지. 아마도 걷고 난 후에 느꼈던 마음의 홀가분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꼈던 그때의 그 마음과 몸의 감각을 잊지 못해, 나의 버킷리스트이기도 한 나의 걷고 싶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떼씀을 한층 아니, 백 층정도 더 고조시켰던 것 같다.


 고행이었던 문경새재를 다녀온 이후로, 아이들에게 '걷자'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새롭게 아이들의 흥미를 끌 만한 '이 것'으로.


"너희들 은화가 뭔지 아니?"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바로 '영남알프스 간월재, 간월산'이었다. 얼마 전 우리 집과도 많이 멀지 않으면서 아이들과 당일로 다녀오기에 좋은 곳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영남알프스'. 그런데 영남알프스의 여러 산을 완등하면 은화와 인증서를 준다고 하는 것이었다. 단 기간에 모두 완등하긴 어렵겠지만, 천천히 하나씩 오르다 보면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에 기대감을 더해 아이들에게 나의 버킷리스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영남알프스 간월재를 오르는 사람들의 유튜브를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15분 정도로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는 간월산 코스. 우리가 실제로 오르는 시간은 아마도 1시간 30분에서 2시간가량이 것으로 예상이 되는 코스지만, 15분의 영상은 아이들에게 산에 가도 좋을 것 같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주어, 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유도하는데  성공적이었다.


 ※ 이 글을 빌려, 등산 유튜버 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간월재와 간월산의 영상을 본 아이들은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은화와 인증서'를 받기 위해, 나와 함께 영남알프스 간월산을 오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아이들과의 협상 중, 그 대가로 간월산을 다녀온 후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나절 자유이용권' (3~4시간 정도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 시간, ex. 4시간 동안 게임만 한다고 해도 무조건 허용하기)을 주기로 했고, 그렇게 나는 아이들과의 계약을 무사히 체결했다.  

 

 




 영남 알프스는 울산, 밀양, 양산, 청도, 경주의 접경지에 형성된 가지산을 중심으로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이 수려한 산세와 풍광을 자랑하며 유럽의 알프스와 견줄만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가지산(1,241m), 간월산(1,069m), 신불산(1,159m), 영축산(1,081m), 천황산(1,189m), 재약산(1,108m), 고헌산(1,034m) 7개의 산을 지칭하나, 운문산(1,188m), 문복산(1,015m)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 등산객 폭증으로 인해 여러 피해를 겪은 '문복산'과 정상석 주변 안전사고 우려가 있는 '재약산'이 완등인증 대상에서 제외되어(2024.2.24 시행), 현재 영남알프스 완등은 9봉에서 7봉으로 바뀌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영남 알프스는 전체 면적이 약 255㎢이며 가을이면 산 곳곳이 억새로 가득한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울주군은 영남알프스 9개 산 정상석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올리면 인증서와 은화를 준다고 하여 나는 아이들과 도전을 시작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완등을 목표로!






 미리 알아본 울주군 간월재의 날씨 분명 '맑음'이었다. 출발할 때도 분명 '맑음'이었다. 그런데 가는 도중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더니 날씨가 많이 흐려졌다. 아마도 나는 '날씨요정'은 아닌가 보다. 노고단에서는 흐림, 문경새재길은 한겨울의 얼어버릴 것만 같았던 추웠던 날씨, 간월산은 '비' 라니.

먹구름을 보는 순간, 나는 멀미가 나는 듯 머리가 아파왔다.

 '비.. 안돼!'

하지만, 다행히 우리가 도착했을 땐 더 이상의 비는 내리지 않았고 분무기로 물을 뿌리듯, 아주 가느다란 빗방울들이 바람에 날리는 정도였다. 


 우리는 배내 2 공영주차장이라는 곳에 주차를 했고, 흐렸던 날씨 때문인지 몰라도 차들이 몇 대 없었다. 미리 알아본 기상예보에 낮은 기온이 아니었던 터라 아이들의 겨울 외투 중, 가장 얇은 겉옷을 입혀서 데리고 왔는데 흐린 날씨에 비까지 왔으니 체감온도는 더 내려갔고, 지나갔다 생각했던 한겨울이 다시 찾아온듯 매서운 날씨가 우리곁에 머물고있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차 트렁크에 챙겨두었던 두꺼운 겨울파카를 아이들에게 한 겹 씩 더 입혔고, 핫팩을 뜯어 아이들과 나의 주머니에 넣은 채 우리는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남편은 차 문을 잠그며,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애들 파카도 한 개씩 입히고, 핫팩까지 , 이렇게까지 해서 여기를 가야 되나? 날씨도 은데."

 대역죄인이 따로 없었다. 아이들만 설득하는 게 아니라 남편도 설득하고 데리고 왔었어야 했는데..

'그래. 맞다. 나는 딸 둘을 키우는 엄마가 아니라, 딸 둘 아들 하나를 키우는 엄마였지.'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남편이 내심 원하고 있었던 '야구!' 다음 주에 있을 사회인 야구경기에 다녀오는 것을 허용해 주며 우리의 협상은 체결되었다.


산에 올라가는 것으로 아이들 그리고 남편과 협상을 통한 계약을 하는 것.

산에 오르는 것만큼, 산으로 오를 수 있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대가를 모두 치렀으니, 이제 맘 편히 올라가 보자.'






 간월산을 올라가는 코스에는 총 세 가지의 코스가 있지만, 우리는 그중 배내 2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간월산(1069.2m)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를 걷기로 했다. 총 6.9km의 거리로, 왕복 약 4시간 정도 소요되는 코스이다.  


 3월이라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초록초록한 새싹들도 보며 간월산을 오르고 싶었는데 계절을 거슬러 올라가 듯, 겨울 한 중간 그리고 곧 해가 질 것 같은 늦은 오후에 머물러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오전 11시를 지나고있는 시간이지만, 뭔지 모를 으스스한 분위기. 지금 당장 산에서 만나면 가장 위험하게 느껴질 야생동물 '멧돼지'가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였다. 

    

 간월재까지의 길은 대체적으로 작은 자갈돌들이 깔려져있고, 자동차 한대정도는 충분이 지나갈만큼 폭이 넓은, 아이들이 걷기에 매우 좋은 길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우리가 산을 오르는 중, 트럭 한 대가 지나갔는데 아이들의 얼굴에서 '짐칸에 저희 좀 태워주세요' 라는 간절한 표정이 묻어났다.  

뒤에서 사나운 멧돼지가 쫒아와 도망가는 토끼처럼, 이 상황을 벗어나고싶고 피하고싶은 아이들과 혹시나 출현할지모를 멧돼지를 방어하는 마음으로 나는 산을 올랐다.    


 아이들과 간월산으로 오르며 산의 고도는 점점 높아졌고, 구름이 산 중턱까지 내려왔을까?  마치 판타지 소설 속에 나올듯한 장면처럼, 눈앞에 안개로 가득한 비 현실적인 세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가시거리가 20m 정도 지나면 흐릿해져서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이들도 나도 처음 경험해 보는 안갯속으로 걷는 여행. 이 날 첫째 아이는 아빠와, 둘째 아이는 나와 함께 손을 잡고 걸었는데 둘째 아이는 '무섭다'는 얘기를 연신 꺼냈다. 귀신이 나올 것 같다며, 걷는 내내 내 팔을 계속해서 끌어당겼고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나예야. 너 우유에 시리얼 넣어먹는 거 좋아하지?"

"네."

"지금 우리는 우유 속으로 들어가는 시리얼이 된 거야. 그런데 일반 우유가 아니라 저지방우유야. 완전 하얀색이 아닌, 조금 뿌옇기도 하고, 연한 하얀색?"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엄마표 시리얼 동화를 들려주며 아이와 나는 안갯속을 걸었다.



 저지방우유에서 일반우유로, 마치 우유 빛깔의 그라데이션을 경험하듯 우리는 드디어 간월재에 도착을 했다. 전문 산악인들은 안개나 구름 때문에 갇힌, 이런 시야의 풍경을 보면 이렇게 얘기하겠지.  '곰탕'의 간월재라고. 예상했던 대로 넓은 평원도 볼 수 없었고, 간월산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내가 갖고 싶었던 은화와 인증서도 물 건너갔다.


 올라가겠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고, 또 허무해졌던 내 마음 때문이었는지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그래. 일단 뭐라도 먹자.'


 우리는 간월재 휴게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뜨아...' 짜파게티가 없다. 둘째에게 간월재 휴게소에서 짜파게티를 사주겠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했는데. 


둘째는 '소문난 맵찔이' 여서 김치도 무조건 씻어서 먹었고, 일반라면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오직 짜파게티만 고집하는 아이였는데.

하는 수 없이, 그나마 맵기가 덜한 '진라면 순한맛'을 골랐고 아이는 그날 인생처음으로 짜파게티가 아닌 '진라면 순한맛'을 먹었다.


 진라면 순한맛을 맛본 아이는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은 짜파게티가 아니라 '진라면 순한맛'이라고 했다.


 '9년 인생' 

처음으로 알게 된 '진라면의 진가(眞價)'.


"나예야. 산을 오르며 먹는 라면은 어떤 걸 먹어도 맛있단다. 산은 소문난 '라면 맛집' 이거든."


 

 그렇게 라면 맛집에서 맛있는 라면으로 허기를 채우고, 우리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구름으로, 안개로 앞이 하나도 안 보여서 '도저히'  '절대' 정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걸음을 떼고 싶지 않은 아쉬운 마음이 커서 울상을 지었지만, 남편과 아이들은 걸음을 뗄 수 있어서 다행인 마음으로 웃상을 지어 보였던, 간월재에서의 우리의 함께 있음 안에 또 다름의 마음을 느꼈던 소중한 추억을 남겼다.




 나는 산에 오르면 내 마음 안에 무언가 모를 감정이 세차게 치밀어 오름을 느끼는 순간들이 많다. 구름과 안개로 가득한 이 속에, 우리 눈엔 보이지 않지만 얼마나 많은 수증기 입자들이 떠다니고 있을까. 입자들 하나하나 마다 내 생각과 내 감정의 의미를 부여했다. 안갯속을 자유롭게 떠다니며, 자연이라는 것이 주는 감동을 내 안에 많이 채우고 담았던 소중했던 순간.



'오늘도 자연에, 간월재에 오길 잘했어. 새로운 길을 걷고 도전해 보는 우리를 응원해. 두려워하지 말자. 뭐든 할 수 있어. '



영남알프스 '간월재'에서.



걷는 것이 많이 힘들지만, 늘 함께 동행해 주는 나연이나예 너무 고마워.







아이들과의 다섯 번째 걷기 여행 중, 어느 한순간.




우리의 걷기 여행은 계속 진행된다.






(대문사진출처. 오뚜기 공식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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