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주인공처럼
새해가 밝았다.
어젯밤은 여기저기서 폭죽을 터뜨리며 아쉬움과 설렘의 교차점에 있었다.
예전엔 새해 첫날이면 새해 결심도 많았는데 올해는 아주 보통의 한 해를 보내기만 바랄 뿐이다.
아침 산책길은 마냥 조용하기만 하다.
요 며칠 동안은 집 앞 호수공원에 겨울 안개가 자욱하다. 흰 눈으로 덮인 산자락은 안개인 듯 구름인 듯 구분이 되지 않아 운치를 더해준다.
산책을 하면서 신선한 공기에 내 몸을 맡기면, 피곤함과 복잡한 생각은 점점 사라지고 심신은 가벼워진다.
겨울 나목의 가지는 내 인생을 보는 것 같다. 나는 고목이 아니고 나목이라 외치듯 더 빨리 걷는다.
산책하는 남녀노소를 지나치다 보면 정겹고 온기가 절로 느껴진다.
호수에서 유영하는 여러 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에너지가 내게 전해진다.
점심은 가족과 함께 떡국을 먹으며 덕담이 담긴 새해 카드를 주고 받는다.
수다를 떨면서 딸이 영화 한편을 추천해 주었다.
오늘 밤에 감상해보란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깔릴 때 다시 L호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수백만 개의 꼬마전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메트로 밴쿠버 최대의 야외 light display로 유명해졌다. 빛의 터널, 테마별 조형물, 화려한 아치형 구조물 등 다양한 포토존도 마련되어있다.
이들 장식은11월 말부터 지루하고 긴 겨울의 어둠과 밤을 매일 지켜왔는데, 아직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느껴져서 좋다.
캐나다의 겨울밤은 유난히 길다. 거기다가 매일 비까지 오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느낌을 상상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동짓날을 기점으로 낮이 조금씩 길어지고 밤은 짧아진다. 저기 반짝이는 색색의 꼬마전구들은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를 환호하듯 영롱하기 짝이 없다.
L호수는 집에서 지척에 있지만 비도 자주 오고, 밤늦게 퇴근하면 산책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작심하고 밤산책을 하는 날이다.
수많은 전구의 불빛 사이를 걷노라면 어느새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 마음 한켠에 있는 그림자마저 위로받고 밝아지는 듯하다.
사진은 잘 찍히지 않지만 인파를 피하면서 나름 휴대폰 카메라로 분위기에 흠뻑 빠져본다.
새해 첫날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영화감상이다.
낮에 딸이 추천한 거니까 끝까지 보기로 했다.
팝콘을 튀겨 먹으면서 영화를 보았다. 팝콘세트도 크리스마스 때 딸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다.
나이 들면서 딸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는 게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제목은 이터너티(Eternity)이다.
사후 세계(after world)를 배경으로 전개되며, 이곳에서 만난 영혼들은 단 일주일 안에 ‘영원(Eternity)'을 누구와 보낼지 선택해야 한다. 주인공 조안(엘리자베스 올슨)은 평생을 같이 살아온 남편 래리(마일즈 텔러)와 젊은 시절 전쟁에서 세상을 떠난 첫사랑이자 첫 남편인 루크(캘럼 터너 )중에서 Eternity의 동반자 선택을 해야 한다.
조안은 평생을 함께한 남편, 래리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함께한 시간이 적었지만 사후세계에서 수십년 조안만을 기다려온 첫사랑, 루크를 택할 것인가?
조안은 누구를 선택할까를 놓고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며 재미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안은 아카이브(archive)에서 과거의 기억과 추억을 그리워하며 최종적으로는 한 사람을 선택하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당신이라면 누구를 선택하고 싶냐고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보다는 설렘이 더한 첫사랑과 새롭게 살아보는 것이 더 좋지 않냐고 떠 보기도 했다. 솔직히 내게 어떤 유리한 답변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부부로 살면 미운 정 고운 정이 있기 마련이다.
조안과 래리처럼 우리 부부간의 살아온 세월도 기억창고에 좋은 것만 가득 차 있으면 좋겠다.
결국 이 로맨스 영화를 인생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인생은 결국 선택의 문제요, 그 판단의 기준은 좋은 추억 쌓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부부간 연인 간 친구 간에도 결국은 좋은 시간과 기억이 쌓이고 쌓여야 관계가 이어질 것이다.
이 영화는 코미디지만 결국 내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또한 이 영화를 보면서 밴쿠버 주변 정경이 자주 나타나 익숙해서 좋았다.
웨스트 밴쿠버의 태평양 해변가, 휘슬러 중간지점인 스쿼미시 산의 곤돌라 정상, 쭉쭉 뻗어 올라간 온대 우림, 분위기 좋은 주택들이 모두 그렇다.
올 한 해는 밴쿠버에서 촬영된 많은 영화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18금의 영화라 할만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Fifty Shades of Grey > 촬영지도 바로 밴쿠버였다. 실제 영화의 배경도시는 시애틀이지만 촬영지는 밴쿠버라는 것이 재미있다.
여기서는 콜 하버 바닷가 옆의 빌딩들. 스탠리 파크와 개스타운,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UBC)등이 등장한다.
이 밖에도 린 캐년 공원,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리지, 차이나 타운, 밴쿠버 아트 갤러리, 이스트 밴쿠버, 라이온스 게이트, 그랜빌 아일랜드 등 많은 곳이 영화의 촬영지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관광 가이드처럼 많이 안내하며 다녔던 곳이기도 하다.
내 주변의 익숙한 공간이지만 내가 영화의 주인공처럼 스크린에 나타난다고 상상해 보면 새로운 맛이 생길 것이다.
그곳에서 같이했던 가족, 친척과 친구들의 얘기와 모습이 툭툭 쏟아져 나올 것 같다.
새해 첫날, 하루하루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좋은 기억을 남기도록 시간을 써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소소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매일매일 맛보며 멋있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