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길은 결국 나를 향해 있었다
어떤 날은 사람들과 대화가 버겁다. 답장을 미루고, 해야 할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관심 있는 것만 파고들며 혼자만의 세계에 숨어드는 게 편하다.
그런데 또 어떤 날은 정반대다. 글을 쓰고, 개념을 정리해 누군가에게 설명해 줄 때 오히려 살아 있음을 느낀다.
왜 나는 이렇게 달라질까?
에니어그램은 이 질문에 답을 주었다.
아홉 가지 성향으로 인간을 설명하는 이 도구는 단순히 “나는 몇 번이다”로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유형이 어떤 발달 단계를 거치는가다. 같은 유형이라도 건강할 때와 불건강할 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는 5번 유형이다. 지식을 탐구하고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려는 욕구가 크다. 건강할 때는 그 탐구가 통찰이 되어 다른 사람과 나눠진다. 실제로 글을 쓰거나, 누군가가 어려워하는 부분을 설명할 때 “아, 이게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불건강할 때는 탐구가 나를 고립시키는 도구가 된다. 관계가 피곤해지고, 사람을 피하며 방 안에만 틀어박히고 싶어진다. 메시지를 미루고, 일도 제쳐둔 채 관심 있는 주제만 파고들며 현실을 외면한다.
정말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일까? 아니면 지금 건강하지 못한 단계에 있는 걸까?
발달 단계를 알게 된 뒤에야 이 기복이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니라 유형의 흐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조금 더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인생 목표도 이와 닿아 있다. 지혜로운 사람, 흔들리지 않는 기준으로 현명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 단순히 많이 아는 사람을 넘어서, 삶에서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왜 하필 ‘지혜’였을까. 이건 단순한 개인적 바람이 아니라, 5번 유형이 건강할 때 나아가는 방향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확신으로 바뀌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통합의 방향이다. 5번이 성장할 때는 8번의 힘을 향한다. 예전의 나는 관심 있는 것만 깊게 파고들고, 머릿속에서만 정리하다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생각은 깊었지만, 행동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글로만 남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실제 삶 속에서 적용하려고 한다. 내가 파고든 것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순간, 나는 비로소 통합의 길에 서 있다는 걸 실감한다.
이처럼 에니어그램은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도가 될 수 있다.
나는 길을 몰라 헤맸던 게 아니다.
방향을 몰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