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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자아

겉과 속, 그리고 그 너머의 나

by Reflector

처음 만난 사람은 늘 나를 활발하다고 한다.

밝게 웃고, 먼저 말을 걸고,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는 모습 때문일 거다.

겉으로는 ESFP 같다고도 한다. 무대 위에서 흥을 돋우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거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다른 말을 듣는다.

섬세하다, 배려심 있다, 감정의 결이 깊다.

그때는 INFP 같다고 한다. 사람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마음을 보듬어주는 태도 때문일 거다.


그런데 아주 가까워져야만 드러나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무심하다, 차갑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내 본래 성향, INTP의 모습이다.


이쯤 되면 질문이 생긴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세상이 보는 얼굴이 진짜일까, 아니면 내가 혼자 있을 때 드러나는 모습이 진짜일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공적 자아, 사적 자아, 비밀 자아라고 부른다.

공적 자아는 사회적 가면이다. 우리는 모두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꾼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원치 않게 정치적인 상황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그때 배운 건 한 가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밝고 무난해 보이는 게 가장 안전하다.”

그래서 나는 공적 자아라는 가면을 조금 더 단단하게 쓰기 시작했다.


사적 자아는 가면을 벗었을 때의 모습이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때, 조용히 탐구와 사유 속에 머무른다.

책상 위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고 글을 쓰는 시간.

무표정으로 있어도 불편하지 않고, 혼자인데도 전혀 외롭지 않은 상태.

그게 내가 본래 느끼는 안락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얼굴이 있다.

바로 비밀 자아다.

이건 나조차 쉽게 꺼내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싶고, 분석되지 않는 영역을 끝까지 파고들고 싶다.

미래나 돈, 관계 같은 현실적 계산은 잠시 잊고, 오로지 탐구와 실험 자체에 몰입하는 모습.

때로는 이 얼굴이 가장 솔직한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이 셋 중 어떤 게 진짜 나일까?

결론은 간단하다. 셋 모두가 나다.

상황에 따라 어떤 얼굴이 앞에 나올 뿐, 그것들은 다 같은 한 사람의 조각이다.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MBTI 같은 성향조차도 결국 하나의 가면일 수 있다는 것을.

환경이 달라지면 어떤 자아가 우선순위를 갖는지도 달라진다.

그러니 “나는 INTP다”라는 말은 나를 설명하는 하나의 키워드일 뿐, 전체는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나는 빙산의 일각이다.

수면 아래에는 더 많은 얼굴이 있다.

그 자아들을 마주할 때, 나는 조금 더 선명한 나를 만난다.


언젠가 그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져 진짜 전체가 드러날 것이다.

아마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단단하고, 더 투명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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