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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비 Aug 31. 2024

분명 뭔가 있는 거야!

아버지의 장례식과 삼우제까지 마치고 고시원 방 안에 들어서자 꿈속을 헤매다가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스마트폰을 책상에 내던지듯 내려놓고 매고 있던 가방을 방구석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코딱지 만한 침대에 쓰러지듯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잠시 그렇게 누워있다가 가방 속에 넣어둔 책이 생각나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책은 보따리에 싸여 가방 안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보따리채 꺼내 책상 위에 던져두고 다시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화장해서 뿌리고 나니 아버지의 흔적은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남은 것이 없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쉽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장례 기간 동안 아버지의 빈소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 아니 나를 기르고 아버지를 모셨던 그분은 아버지를 장례식장에 모시자마자 내 손을 잡고 소리 죽여 펑펑 울다가 떠나셨다.

"아버지…, 아니 선대 왕검님의 말씀을 절대 잊지 마세요.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



차오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내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던 엄마. 붙잡고 싶었다. 그냥 함께 살자고 떼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30년 넘는 시간을 나와 아버지를 위해 살아오신 분이었다. 정말 어머니라면, 정말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남은 삶을 존중하고 아낀다면 보내드리는 게 맞는 선택이었다. 이제라도 당신의 삶을 사시라고. 믿을 수 없는 사건 덕분에 나는 졸지에 서른 살 먹은 고아가 됐다. 홀로 남아 지키는 텅 빈 장례식장에서 엄마가 건네준 보따리를 풀었다. 두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한 권은 한자, 다른 한 권은 한글로 쓰여 있었다. 한자로 쓰인 책은 많이 낡았고, 한글로 쓰인 책은 그나마 최근에 만들어진 듯 깨끗했다. 한자에는 영 젬병이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한자로 쓰인 책의 내용을 해석해 한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환…웅…세…기?"



‘환웅세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은 내 조상과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건성건성 책의 내용을 훑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허무맹랑하게 지어낸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 어이없는 한숨만 나왔다.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물건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내팽개쳤을 것이다. 책의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천부인과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이 땅에 내려왔다. 환웅은 웅녀와 결혼해 단군왕검을 낳았다. 단군왕검은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한다는 가치를 받들어 고조선을 세웠다. 단군왕검은 환웅의 후손으로 천부인을 지키는 첫 수장이며 군주였다.’

이렇게 시작된 책의 절반 가까운 내용은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군가가 또 누군가를 낳았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가계도로 채워져 있었다. 지루한 가계도의 맨 마지막에 드디어 아는 이름이 나타났다. 아버지와 나였다. 이 책에 따르면 아버지의 진짜 이름은 ‘서진’이 아니라 ‘주'였다. 내 진짜 이름은 '원담'이 아니라 ‘해'였고. 역사에서 지워지고 잊힌 고조선의 왕족이며 환웅의 자손. 믿거나 말거나 그것이 바로 아버지와 나, 우리 집안의 실체였다.

‘가문이 망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찌질하게 살지 않았을 텐데….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

책의 나머지 절반은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었다. 책에 따르면 가문은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도 새로운 왕조에 적극 협조했다. 그렇게 신분을 바꿔가며 계속 살아남았다. 가문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도 협조했다. 하지만 몰락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가문을 덮쳐왔다. 가문이 몰락한 이유에 대해 책은 ‘삼재’ 때문이라고 적고 있었다. 

‘삼재? 혹시 아버지가 꼭 찾으라고 말씀하셨던 천부인, 뭐더라… 그렇지! 방울, 거울, 칼 그걸 말하는 건가?’

책에 따르면 하늘의 아들인 환웅이 하늘에서 가지고 온 세 가지 보물인 청동방울, 청동거울, 청동검을 ‘삼재’라고 불렀다.

삼재에는 신기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방울은 필요한 말을 듣게 하는 힘, 거울은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힘, 칼은 용기를 북돋우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권력자들은 삼재의 힘을 이용해 백성의 마음을 얻고, 기존의 권력자와 적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힘을 가진 세력들은 호시탐탐 ‘삼재'를 노렸다. 하지만 삼재의 힘은 우리 가문만이 다룰 수 있었기에 힘을 내주고 새로운 신문과 안전을 보장받는 불편한 공생관계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가문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이 다른 가문의 일부 사람들이 기존 권력자들에게 밀고를 하거나 배신을 하면서 번번이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삼재의 힘은 오랜 세월 권력에게 봉사하며 이용당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조선 왕조가 문을 닫고 지금의 정부가 수립될 때도 가문은 복잡한 셈법을 가진 정치 세력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또 한 번 굴욕적인 협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가문의 수장, 왕검이었던 고조할아버지가 목숨을 건 결단을 내린 것도 바로 이런 역사적 상처 때문이었다.

하늘의 보물이 욕심에 찌든 권력자들에게 더 이상 악용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결심한 고조할아버지는 은밀히 전국에 남아 있던 가문의 조력자 후손들에게 삼재를 보내 숨기는 데 성공한다.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숨겼는지는 고조할아버지 본인 말고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삼재와 가문은 세상 속으로 숨어버렸다. 평화로운 시간도 그리 길게 가진 못했다.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나선 군인들이 가문을 수소문해 찾아왔다. 그들은 무력을 앞세워 찬탈한 권력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삼재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 사이 고조할아버지로부터 왕검의 자리를 물려받은 할아버지는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끝끝내 협조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집안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왕검인 할아버지는 이적행위를 했다는 누명을 쓰고 혹독한 조사를 받다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시 십대였던 아버지는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망쳐 추적자들을 피해 신분을 숨긴 채 전국을 떠돌며 살아야 했다. 유목민처럼 세상을 떠돌던 아버지는 잠시 머물던 일산 신도시에서 한 여자, 내 친엄마를 만나 마침내 뿌리를 내리고, 쉰이 다 된 나이에 기적적으로 나를 얻었다. 아버지의 선한 면모에 끌렸던 내 친엄마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끝을 알 수 없는 무기력과 패배감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어린 나를 남겨 놓은 채 떠났다. 그 빈자리를 내가 엄마라고 믿어왔던 분이 채워주었다. 그분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에 아버지도 나도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수 있었던 셈이다.

눈물바람으로 장례식장을 떠나가던 그분의 모습이 다시 떠올라 울컥 눈물이 고였다. 어른거리는 눈물 너머로 책의 마지막 장에 연필로 휘갈겨 쓴 낯익은 손글씨가 보였다.




‘삼재가 돌아와 환웅의 나라가 다시 열리면 세상이 널리 복되게 되리니….’



들고 있던 책을 덮어 바닥에 던지듯 내려놨다. 명치 근처에서 출렁거리던 짜증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울컥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어쩌라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인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생각보다 큰 목소리에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싸움이라도 났나 싶어 빈소 안을 들여다봤다. 텅 빈 빈소 안에 심란한 얼굴로 앉아 있는 나를 본 사람들은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시비 걸릴까 걱정하며 못 본 척, 못 들은 척 시선을 거두고 제 갈 길을 갔다.

“먹고사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남긴 물건만 아니었으면 그냥….”

바닥에 내던졌던 책을 다시 주워 들어 보따리에 꾸역꾸역 쌌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가방에 던져 넣고 장례를 치르는 내내 눈길도 주지 않았다. 드디어 발인날. 어찌어찌 장례식장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관을 운구차에 실었다. 그리고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가방을 챙기기 위해 빈소에 들렀던 나는 낯선 사내와 마주치고 말았다.

“어, 어! 당신 누구야? 여기서 뭐 해!”

신발을 신고 모자를 눌러쓴 채 빈소에 들어온 사내가 내 목소리를 듣고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사내는 가방을 열고 그 안에 있던 보따리를 꺼내 펼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상황이었다. 아무 대답이 없는 사내를 또 한 번 다그쳤다.

“누구냐고? 뭐 하냐고?”
“저…, 저….”

거듭되는 질문에 쭈뼛거리던 남자가 갑자기 보따리를 움켜쥔 채 나를 밀치고 비상계단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나는 휘청하며 바닥에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야! 야! 거기서! 거기 서라고!”

다시 일어선 나는 정신을 차리고 사내가 사라진 비상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남자는 반 층쯤 앞에서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남자가 계단 출입문을 열고 1층 로비로 나갔다. 간 발의 차로 닫히는 문을 밀치고 구르다시피 로비로 나왔다. 남자는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상주와 부딪혀 넘어져 있었다. 바닥에 넘어진 상주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 바람에 발인을 위해 이른 시간에 장례식장을 찾았던 조문객들의 시선이 남자와 상주 쪽으로 집중됐다. 넘어진 남자 곁에 보따리가 떨어져 있었다.

“내 보따리 내놔, 이 새끼야!”

내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를 지르자 1층 사무실에 있던 장례식장 직원들이 싸움이라도 났나 싶어 사무실에서 나와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는 쓰고 있던 모자를 한층 더 깊게 눌러쓰며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진짜….”
“뭐라고 이 새끼야?”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리며 틈을 엿보던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켜 장례식장 밖으로 바람처럼 달아났다. 내가 그 뒤를 쫓아가며 소리를 질렀다.

“야! 거기 서! 거기 서라고 새끼야!”

몇 걸음 쫓아가다 멈춰 서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보따리를 주워 들었다. 다행히 책은 보따리 안에 그대로 있었다. 장례식장 직원과 조문객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래? 상주 양반 괜찮아?”

곁에 다가온 나이 지긋한 조문객 한 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좀도둑인가 봐요. 괜찮습니다 어르신.”
“큰 일 치르는데 험한 일까지 당하고…. 괜찮다니 다행이네 그려.”

조문객 어르신은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고 천천히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이른 새벽이라 건물 바깥은 아직 어두웠다. 시선이 닿는 곳 어디에도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책을 왜 훔치려고 한 거야? 뭐 하러?’

나도 모르게 보따리에 손을 넣어 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낡고 거친 종이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돈 좀 되는 골동품인 줄 알았나? 아님 조의금 보따리?’

보따리를 들고 다시 빈소가 있던 지하층으로 내려왔다. 가방은 빈소 앞에 떨어져 있었다. 가방을 집어 들어 그 안에 책이 든 보따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영구차가 기다리는 1층으로 올라왔다. 영구차 조수석에 올라타 화장장으로 가는 내내 아버지의 영정사진과 가방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차가운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차의 진동이 고스란히 머리에 전해졌다. 진동을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알고 했든 오해했든 누군가 정말 이 책을 탐내고 있는 거라면? 아니야, 아니야.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일한 유품인데… 그럴 수는 없지. 암 그러면 안 되는 거지. 그러면 안 될 건 또 뭐야! 이제 내 건데. 내 마음 대로 해도 되는 거잖아! 그래도….’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전히 믿을 수 없고, 읽을 수 없는, 쓸모와 가치가 애매한 낡은 책이었지만, 순간만큼은 달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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