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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비 Sep 21. 2024

부끄러운 진심

방울 보관자의 청에 따라 그의 집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갑자기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했던 더벅머리도 함께 묵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방울 보관자는 너그럽게 허락했다. 방울 보관자가 내준 저녁을 먹고 방에 누웠다. 막차를 타고 떠난 어젯밤부터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꿈인 것만 같았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방울을 다시 꺼내 요모조모 살펴봤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방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책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평범한 물건에 사람들이 탐내는 힘이 들어있다고?’

산 사람을 좇아 우르르 달려가는 좀비 떼처럼 방울을 향해 욕심에 사로잡힌 눈빛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의 모습.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고 섬뜩해 몸이 저절로 떨렸다.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 다시 흥정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방울을 다시 가방에 넣고 스마트폰 중고거래 어플을 띄웠다.

‘첫 번째 물건 확보!!!!!’

한동안 잠잠하던 메시지 창에 폭풍 질문이 올라왔다.

‘확보? 찾았다는 겁니까?’
‘뭐였습니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어떻게 찾았어요?’
‘지금 어딥니까?’
‘사진 가능합니까?’

역시 몸이 바싹 달아 있다. 유리한 고지를 하나 선점한 셈이니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이제 협상의 고삐를 살살 당겨볼 차례였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 입이 제멋대로 귀에 가서 걸렸다.

‘아이고, 진정 좀 하시고요. 방울이예요. 방울.’

바로 답 메시지가 올라왔다.

‘방울! 아, 방울! 어떻게 생겼습니까? 사진 보낼 수 있습니까?’

방울을 다시 가방에서 꺼내 사진을 찍어 전송했다.

‘진짭니까? 그냥 보통 방울처럼 생겼는데.’

나이스! 걸려들었어. 의심하는 말투를 꼬투리 삼아 짜증 섞인 답장을 보냈다.

‘의심해요? 아, 놔, 이거 땜에 죽다 살았는데. 뭔 말이야 진짜 씨. 다시 맡기고 갈 테니까 와서 찾아가실래요?’

상대는 당황한 듯 곧바로 꼬리를 내리며 사과했다.

‘사과하죠. 수고했습니다. 아직 담양입니까?’

변명 없는 쿨한 사과에 마음이 조금 풀린 듯 대답하는 톤을 낮췄다.

‘방울 준 사람 집이에요. 오늘은 여기서 자고 이동하려고요.’
‘다음은 어디라고 했죠?’
‘강원도 원통이요.’
‘먼 길이군요. 수고했습니다. 첫 물건 확보. 두 번째도 무사히 확보하길.’

아직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고, 어떻게든 내 기분을 맞추려고 눈치 보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일격을 날릴 순간이다. 이번에는 고삐를 슬쩍 늦춰 줄 타이밍이다. 그래서 호칭도 내 마음대로 사장님으로 바꿨다. 내가 아는 한 ‘사장님’ 소리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싫은 척 내숭 떨 뿐이지.

‘사장님, 생각해 봤는데 이거, 돈, 더 주셔야 될 것 같아요. 해보니까 위험하고 어렵고 엄청 힘들어요. 백만 원으로는 턱도 없겠어요.’

대답이 바로 올라오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중이겠지. 그때 스마트폰 알림이 울렸다. 창을 내려 확인하니 활동비 200만 원이 입금됐다는 은행 어플 알림이었다. 곧바로 채팅창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두 번째 활동비와 보너습니다.’
‘물건 값은 물건 다 찾고 나서 따져봅시다.’

오케이, 오늘은 여기까지. 욕심부려서 더 밀어붙이면 산통 다 깨질 수도 있다.

‘네 네, 사장님! 다시 연락할게요.’

만족스럽게 웃으며 중고거래 어플을 닫고 고개를 들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들어오던 더벅머리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알고 보니 더벅머리도 환웅의 후손을 보필하던 집안의 후손이었다. 다시 말해 내 신하, 부하쯤 되는 셈이다. 녀석의 몰골을 보면… 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은둔하고 있던 신하들은 죄다 훤칠하고 능력도 뛰어나고 그러던데, 이 녀석의 외모와 성격, 능력은 뭐랄까, 지나치게 정직하고 현실적이다. 한 톨의 상상력도 판타지도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뭘 보셨길래…. 재미있는 거면 같이 봐요.”

더벅머리의 말에 나쁜 짓 하다가 들킨 것 같아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재밌기는… 아무것도 아니야.”
“저 진짜 가슴이 두근거리고 막 신나고 들떠서 진정이 안돼요. 내가 직접 왕검님을 만나다니….”

더벅머리가 머리에 수건을 쓴 채로 가까이 다가오며 눈빛을 초롱초롱 빛냈다. 부담스러웠다.

“아니, 난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난 그냥 보물이나 찾아서….”

제 흥에 흠뻑 젖은 더벅머리가 여전히 멍한 눈빛을 하며 말을 끊고 나섰다.

“맞아요! 보물 찾아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지요. 어릴 때부터 누군가한테 두들겨 맞거나 무시당할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지금도 왕검님이 어딘가에서 삼재를 찾고 있을 거다. 머지않아 삼재를 다 찾아서 나 같이 못난 사람들도 무시당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실 거다. 그때까지만 참고 버티면 된다.”

더벅머리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오늘 왕검님을 여기서 만난 거예요. 와! 이걸 누가 믿어주겠어요? 나라도 못 믿었을 거야. 정말. 게다가 왕검님이 저랑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서 더 놀랐어요. 힘세고 돈 많고 잘생긴, 아니, 왕검님이 못생겼다는 게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아무튼 그런 영웅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평범함 사람. 그런 분이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드디어 삼재를 찾기 시작했다! 상상만 했던 일이라 정말 흥분돼요. 저요, 왕검님만 믿고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저 나중에 높은 사람이나 부자 그런 거 안 시켜 주셔도 돼요. 정말요. 충성!”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손짓 발짓에 거수경례까지 해 보이는 더벅머리를 보며 나도 불과 며칠 전에 환웅이니 삼재니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새로운 세상이니 널리 복되게 하는 일이니 하는 것은 관심도 없고 중고거래 어플에서 만난 사람에게 보물과 책을 팔아치울 생각이라는 말을 결코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더벅머리의 온몸에서는 흥분과 기대, 감격의 아우라가 콸콸 뿜어져 나왔다.

“으, 응, 그래, 뭐 그렇지.”
“왕검님! 제가 가진 책에 왕검님 책에는 없는 내용들이 있어요. 아마 우리 아버지가 삼재를 숨긴 이후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들을 나중에 추가한 것 같아요. 여기를 보면요… 여기 있다. 내일 갈 원통에는 거울이 있어요.”

“거울?”
“네, 그 거울에는요…”
“잠깐, 잠깐만. 그 왕검님 소리 좀 어떻게 안돼?”
“왕검님을 왕검님이라고 하지 뭐라고 해요?”
“민망하고 쑥스럽고 그렇단 말이야.”
“아이고, 쑥스러울 것도 많네요.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봐 솔직히 쪽팔려서 그러죠?”

더벅머리가 정곡을 찔렀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렸다.

“그럼 뭐라고 해요?”

은밀한 비밀을 전달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둘만 있을 때는 왕검님 오케이! 하지만 사람들 있을 때는 형님. 내가 더 보다 두 살이나 많으니까. 언제나 형님이라고 하면 그게 더 좋고.”

잠시 생각하던 더벅머리가 말했다.

“왕검님하고 말하면 폼 좀 나는데, 있어 보이기도 하고…. 할 수 없죠. 알겠어요. 왕검.. 아니 형님! 아, 씨, 호칭이 두 개라 더 헛갈려…. 근데 제 이름 아세요?”
“몰라, 안 가르쳐 줬잖아.”
“당연히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충성을 맹세했는데!”
“알았어, 알았어. 이름이 뭔데?”
“풍백이요!”
“푸훕! 푸, 풍백?”

무협지 주인공이야? 어쩐지 반려견 이름 같기도 하고. 옛날 수업시간에 들어봤던 것도 같은데. 가만…. 책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거느리고 왔다는 신하들 중에 이런 이름이 있지 않았나? 촌스럽지만 오묘한 이름을 듣고 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서둘러 입을 가리는 내 얼굴을 더벅머리 아니 풍백이 노려봤다.

“그냥… 부르기 편하게 백이라고 하자. 백아! 불 꺼라. 자자.”

낯선 방, 낯선 어둠 속에서 백이의 코 고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백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 같이 못난 사람들도 무시당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거라던 그 말. 내가 그런 세상을 연다고? 되지도 않는 생각 말자. 아서라. 나 같은 게 무슨…. 물건 찾아서 돈이나 두둑이 받으면 그만이지. 고단한 하루였다. 돌아누워 눈을 감자마자 잠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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