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통 터미널에 내려요.’
‘두 번째 물건 찾으면 연락드릴게요.’
‘가격 다시 생각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채팅 창에 메시지를 남기고 중고거래 어플을 닫았다. 오후의 햇살이 가득한 원통터미널은 나른하고 한산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나와 광주종합터미널에서 출발한 지 꼭 여섯 시간 만이었다. 방울을 찾았다는 자부심이 마음속에 한가득 들어찬 덕분인지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정겹고 여유롭게만 보였다. 잠이 덜 깬 얼굴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백이의 표정까지도. 두 번째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까지 가는 버스는 한 시간 후에 출발이었다. 터미널을 나와 오후의 햇살 속을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버스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길을 따라 걷고 있었으니까.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 분위기에 푹 젖어 이렇게 됐으니 다음 정류장까지 시골길을 걸으며 조금 더 분위기를 즐기기로 했다. 하지만 낭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백이 녀석이 끝도 없는 불평불만을 늘어놨다. 이럴 때는 확실한 한방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맛집일 가능성이 높은 부대 앞 짜장면 집에서 짜장면 곱빼기와 탕수육 추가! 말은 싫다고 하지만 입은 웃고 있다. 못 이기는 척 앞장서 걷는 녀석의 뒷모습이 신바람으로 가득했다. 길은 좁고 아슬아슬했다. 트럭과 승용차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쌩쌩 스쳐 지나갔고,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굉음과 함께 질주했다. 우리는 차들을 피해 한 뼘 남짓한 길어깨에 바짝 붙어 걸었다. 앞서 걷던 백이가 우뚝 멈춰 서서 뒤 따라 걷던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택시 타요 형.. 아니 왕검님! 이러다가 먼지 때문에 숨 막혀 죽던가 저 무지막지한 트럭에 치어 죽던가 둘 중 하나겠어요.”
짜장면과 탕수육 때문에 잠시 너그러워졌던 백이가 다시 투덜거렸다.
“너, 돈 있어? 짜장면 곱빼기에 탕수육 살 돈? 택시 타면 돈 없어서 그거 못 사준다. 그래도 괜찮으면 택시 호출하고… 아니면 계속 걸어….”
내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던 백이도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백이와 함께 다니기로 결정한 건 신하니 뭐니 하는 그런 관계 때문이 아니었다. 삼재니 새로운 세상이니 하는 것 때문도 더더욱 아니었다.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덜 심심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나보다 삼재에 대해 많이 알아 찾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건 완전 오산이었다. 하루 만에 파악한 백이의 정체는 수다스럽고 잘 삐치고, 눈치도 없는 녀석이라는 것이었다. 먹는 걸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아무 거나 먹지 않는 까다롭고 확고한 취향.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동행이었다.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상하게도 밉다가 귀여웠다. 귀찮다가도 궁금했다. 화가 나다가도 애처로웠다. 전생에 헤어진 연인이나 자식을 만나면 이런 기분이지 싶었다. 겨우 하룻밤, 하루낮을 같이 지냈을 뿐인데 이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불장군처럼 살았던 30년 인생의 부작용인가? 아니면 보상? 잘 모르겠다. 편도 2차선 길을 한 시간 넘게 걸어온 우리는 결국 버스 대신 지나가던 트럭을 얻어 타고 두 번째 보물이 있는 주소와 멀지 않은 군부대 앞 마을에 내렸다. 마을 입구 편의점에서 콜라 두 갠을 사 와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캔 뚜껑을 따며 백이가 말했다.
“근데요, 왕검… 아니 형님!”
왕검이라는 호칭에 인상을 쓰자 백이가 다급하게 형님으로 호칭을 고쳤다.
“거울이요, 이번에는 어쩌실 거예요?”
“뭘 어째?”
“방울처럼 뭔가 가져갈 방법을 생각해 둔 게 있냐고요.”
“없어.”
“으엑? 방울 때도 죽었다 살았는데 … 이러다가 이번에 진짜 죽어요! 그러면 삼재고 뭐고 다 뭔 소용이에요?”
“나보다 삼재를 더 많이 아는 네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아냐?”
“지난번처럼 아버님과의 옛 일에서 뭔가 떠오르는 건 없고요?”
“없어. 근데 거울의 힘이 뭐라 그랬지?”
내 물음에 백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콜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그새 잊으셨어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힘이라고 어젯밤에 말씀드렸잖아요.”
“거짓말 탐지기처럼 딱 비춰보면 진짠지 가짠지 알 수 있다는 거잖아? 그거 잘 이용하면 떼 돈 벌지 않을까?”
“삼재가 무슨 거짓말 탐지기예요? 어떻게 그런 잡스러운 생각을… 진짜 환웅님의 후손 맞아요? 모름지기 삼재의 힘이라면 세상의 이치, 세상의 질서는 어느 쪽으로 흘러야 맞는가, 진짜 영웅과 가짜 영웅은 누구인가! 백성들의 진짜 마음은 어떤 것이고 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정도는 돼야죠. 이래야 세상을 여는 보물의 힘이죠.”
정색한 백이의 말에 살짝 민망해져 겸연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흠흠.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서 얼마나 더 가야 돼?”
지도앱을 켜고 살피던 백이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다 왔어요. 정류장 앞 골목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꺾어지면 보이는 맨 마지막 집이에요.”
남은 콜라를 단숨에 비운 우리는 성큼성큼 걸었다. 도착한 곳은 대장간이었다.
“여기 맞아?”
당황스러운 물음에 백이도 어이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여기 맞아요. 와, 씨, 지난번엔 무당집, 이번에는 대장간이냐?”
화로에서는 벌건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칼이나 농기구 따위가 벽을 따라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 실례합니다! 계세요? 계세요?”
백이가 조심스럽게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아무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백이가 한번 더 소리쳤다.
“아무도 안 계세요~오?”
그때였다. 기름때 투성이 작업모를 쓴 노인이 대장간 안쪽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다. 노인은 기름때에 전 목장갑을 끼고 있었고, 검은 토시를 양팔에 끼고 가죽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노인이 신고 있는 장화가 걸을 때마다 저벅저벅 소리를 냈다.
“왔군. 준비해!”
노인의 낮고 굵은 음성이 대장간 안에 울렸다. 우리 둘은 마치 주문에 걸린 것처럼 매고 있던 가방을 벗어 한 구석에 던져 놓고 주섬주섬 모루 곁으로 다가갔다. 노인이 장갑을 내밀었다. 레이저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노인의 눈빛에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고분고분 받아 꼈다. 장갑을 끼던 백이가 몰래 눈짓을 했다.
‘형님 어떻게 해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도 몰라. 일단 하라는 대로 해!’
백이가 작게 한숨을 쉬고 양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노인은 작업에 필요한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 뭔가 말을 걸려고 할 때마다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봤다. 노인의 얼굴에 새겨진 흉터와 어우러져 몇 배는 더 공포스러워 보였다. 그 서슬에 눌려 번번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잡아, 바람 넣어, 식혀, 때려, 달궈, 그게 아니야! 정신 차려!”
처음 해보는 풀무질과 모루질, 담금질에 어깨와 허리가 끊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양손은 이미 물집 안에 물집이 잡혔을 만큼 엉망진창이 됐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다. 대장간 안에 불이 켜지자 그 빛이 닿지 않은 집 주변은 더욱 어두워졌다. 군부대 근처, 산과 인접한 마을은 빠르게 조용하고 어두운 밤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다 됐다!”
노인의 말에 물 먹은 솜처럼 지쳐 쓰러져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나와 백이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백이가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빨리 노인에게 거울에 대해 물어보라는 걸.
“네, 애쓰셨네요. 아휴 참… 아니, 애는 우리가 더 썼지만… 아무튼 이제 말씀 좀 …”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아까 나왔던 대장간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멍하니 노인이 건네준 물건을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백이가 말했다.
“형.. 아니 왕검님! 이제 어쩐대요?”
노인이 건네준 물건은 손바닥 만한 크기의 쇠로 만든 얇고 둥근 판이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준 거야? 쇠원판을 옆에 끼고 노인이 사라진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형님! 같이 가요!”
백이가 구석에 있던 가방을 챙겨 들었다.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넌 거기 있어.”
말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방을 움켜쥔 백이가 내 뒤에 바싹 따라붙었다.
“형님 따라갈래요. 여기가 더 무서워요.”
문 안쪽은 커다란 방이었다. 창문도 없는 방 안에는 온갖 모양의 쇠로 만든 여러 가지 모양의 판들이 벽에 걸려 있거나 기대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이게 다 뭐래요?”
예상치 못한 풍경에 백이가 놀라며 말했다.
“청동거울이다. 그 손에 들린 것도.”
방 가운데 서 있던 노인이 짧게 대답했다. 노인의 목소리가 동굴처럼 방 안에 울렸다.
“줄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 가져가라.”
담양의 방울 보관자 소년에게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노인에게 물었다.
“또요? 이번에는 어떻게요?”
노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대답했다.
“볼 수 있으면, 가질 수도 있겠지.”
말을 마친 노인은 조금 전에 들어왔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보나 마나 저 문은 잠겼을 테고, 문제를 풀어야 열리겠지? 방울 때처럼. 그나저나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무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