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뭐 힌트가 될 만한 건 없어?”
백이는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없어요. 아까 얘기한 진실과 거짓 말고는… 그런대요, 들고 있는 거, 그게 뭔가 힌트 그런 거 아닐까요?”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었다. 혹시 크기나 모양이 같은 걸 찾아야 하나? 들고 있는 청동거울을 방 안에 있는 것들과 하나하나 비교해 봤다. 크기와 모양이 모두 달랐다. 이걸 저기 걸려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와 바꿔야 하나? 모양이 같은 거? 다른 거? 크기가 비슷한 거? 다른 거? 아, 씨 어떻게 하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중 옆에서 뻘쭘하게 서 있는 백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럴 때는 가장 단순한 게 정답이다.
“일 번, 이 번, 둘 중 하나 골라!”
“그게 뭔대요?”
백이가 여전히 멀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쫌, 아무거나 둘 중 하나 맘에 드는 거 골라보라고! 일 번? 이 번?”
짜증스러운 내 대답에 백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이 번이요!”
오케이, 그렇다면 모양이 다른 것과 바꾼다. 비슷한 크기의 네모난 청동거울이 걸린 벽으로 다가갔다. 떼어냈다. 제법 무거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 들고 있던 청동거울을 걸었다. 담양에서처럼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까 싶어 지레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모양하고 바꾸는 게 아닌가? 역시 크기였나? 걸었던 청동거울을 떼어내고 네모난 청동거울을 원래 자리에 걸었다. 그리고 가장 큰 동그란 청동거울이 걸린 반대쪽 벽으로 가서 들고 있는 청동거울과 바꿔 걸었다. 손을 떼며 찔끔했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양도 아니고 크기도 아니면 도대체 뭐야!”
투덜거리며 백이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며 발에 힘이 풀려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놀라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
“형님, 괜찮아요!”
백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대답하면서도 뭔가 이상했다. 백이의 목소리가 아까 노인의 목소리처럼 방안에 울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지러움이 좀 가라앉은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아직 어지러운가 싶어 눈을 몇 번이나 껌벅이고 비벼봤다. 하지만 이건 실제였다! 스무 명의 백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우… 이게 바로 지옥이로구나. 하나도 벅찬데 스무 명이라니. 스무 명의 백이가 제각각 떠들기 시작했다. 방울소리도 없는데 골치가 아파왔다.
“모두 조용! 조용! 조용~~~~!”
이건가? 거울의 시험이. 진짜를 가려내고 알아보는 거. 스무 명의 백이를 찬찬히 둘러봤다. 생긴 거, 입은 거, 하는 말, 하는 행동 모두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하는 와중에 기발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진짜는 모르겠지만 가짜는 알아낼 수 있는 방법! 우선 스무 명의 백이를 다섯 명씩 네 줄로 앉혔다. 정리해 놓으니 좀 나아 보였다. 오와 열을 맞춰 앉은 스무 명의 백이가 한눈을 팔고 있는 순간을 기습했다.
“내가 진짜 풍백이다, 손!”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무 개의 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머리 위로 올라왔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 거기! 그래 네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그래, 너. 너 탈락!”
“저요? 제가 왜요?”
지목당한 백이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 빨랐어. 진짜 풍백은 그렇게 빠르지 않아. 느려터졌거든. 그래서 넌 가짜야.”
나머지 열아홉 명의 백이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생각해 냈지만 정말 기발한 방법이야. 그 순간 벽에 걸려 있던 청동거울 하나가 소리 없이 날아와 가짜라고 지목한 백이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머리를 맞은 백이가 인형처럼 쓰러졌다. 죽었는지 미동도 없었다.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게 뭐야! 유쾌한 퀴즈쇼가 아니라 죽음의 서바이벌이었다. 방금 머리를 맞은 게 진짜는 아니겠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남은 열아홉 명의 백이가 저마다 제가 진짜라며 살려달라고, 죽고 싶지 않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조용히 하라고 호통을 쳐도 소용없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 안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밖에 있으라니까 왜 따라 들어와서 …. 혼자 왔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냐. 하여튼 저 녀석….’
뾰족한 수가 없어 열아홉 명의 백이를 둘러보며 손톱만 물어뜯고 있던 내 머릿속에 스멀스멀 원망과 비난이 싹트기 시작했다.
‘저 녀석 생긴 것도 맘에 안 들었어. 하는 짓은 어떻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먹는 건 아휴, 진짜 극혐이지! 저런 걸 신하, 아니 부하, 아니 동생이라고….’
싹튼 비난과 원망은 갑갑한 상황과 짜증을 양분으로 먹고 순식간에 무럭무럭 자랐다.
‘쟤는 우리 가문 부하잖아. 난 왕검이고. 왕검인 내가 말단 부하가 죽는 것까지 신경 써야 되나? 신하라면 왕검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충성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러다가 죽으면… 억울한 게 아니라 영광스러운 거지. 안 그래?’
옆에 내려놨던 청동거울을 다시 주워 들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어도 되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거야. 나는 살고, 풍백은 죽어도 된다. 아니, 풍백을 죽여야 왕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게 되는 거지. 무섭고 싫지만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거! 그게 진짜 영웅, 왕검이 할 일이지. 그렇고 말고!’
청동거울을 들고 열 맞춰 앉아있는 열아홉 명의 백이 쪽으로 다가갔다. 한참을 소리 지르며 난리를 치던 녀석들도 몇몇은 지쳐 잠들고 몇몇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무심하게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용기를 내서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시험. 열아홉 명의 백이를 모두 죽이는 것. 진짜까지 죽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모두 죽여 자격을 증명해 보이고 진짜 거울을 찾아내는 것이 내 정해진 운명이니까. 나는 그래도 되는, 그래야 하는 왕검이니까. 청동거울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열아홉 명의 백이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때였다. 얼굴 앞을 스치던 청동거울에 뭔가 얼핏 비쳤다. 그럴 리가 있나. 이건 연마하지 않은 투박한 청동거울인데. 거울처럼 연마했다고 해도 이렇게 번쩍이며 뭔가를 반사해 낼 수도 없을 텐데. 머리 위로 들어 올렸던 청동거울을 천천히 내려 들여다봤다. 청동거울 안에는 내 얼굴이 들어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하늘로 솟구친 눈꼬리와 입꼬리. 악마 같은 얼굴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미쳤구나. 보물 욕심에 정신 줄을 놓았구나. 백이를 죽이고 그걸 얻겠다고? 평생 나를 기다려왔고, 평생 따르겠다는 애를 죽이겠다고? 그런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고? 내가? 부끄러움과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거울이 보여주는 진실은 내가 감추고 싶었던 추악한 욕심이었다. 부끄러운 고통이었다. 인정할 수 없었던, 인정하지 않고 싶었던 비열함이었다. 그게 뭐 어쨌다고? 난 그럴만한 사람이잖아. 왕검이라며? 내가 새로운 세상을 열거라며?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거잖아. 이게 바로 그거라고. 주저하지 말고 빨리 내려치라고! 머리를 깨부숴 죽여버리라고! 마음 한편에서 무서운 목소리가 물러서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아냐, 아냐, 이건 아니야!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들고 있던 청동거울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무서운 목소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는 할 수 없어.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꼭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욕심에 눈이 먼 바보 멍청이… 그게 바로 나야… 그게 바로… 그래야 하는 게 내 일이라면… 차리리 안 할래….”
열아홉 명의 백이가 멀뚱 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몇몇은 옆으로 다가와 찔끔찔끔 눈문을 짜며 내 어깨를 토닥이기까지 했다. 내 눈에서 떨어진 눈물 방울이 손에 들고 있던 청동거울에 떨어졌다. 눈물이 떨어진 자리부터 시작해 거울의 한쪽 면이 LED조명처럼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을 받아 방 안에 있던 모든 청동거울들이 반짝이며 사방으로 빛을 반사했다. 순식간에 눈을 뜰 수 없는 밝은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 들렸다.
“왕검, 아니 형님! 형님, 왕검님!”
“으응, 왜, 왜 그래?”
“괜찮으세요? 눈 좀 떠보세요!”
빛 때문에 눈을 감았다가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눈을 떠보니 열아홉 명의 백이는 온데간데없고 한 명만 남아 있었다. 다행이야. 아까 죽은 녀석이 진짜가 아니었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방의 모양이 바뀌어 있었다. 벽에 걸리거나 기대어 있던 청동거울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방 가운데 이젤 위에 우리가 노인과 함께 만들었던 둥그런 청동거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거울의 앞 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제야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제 짐을 덜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문이 열리고 노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노인은 방 가운데 서서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나는 이젤로 다가가 가만히 손을 뻗어 청동거울을 집어 들었다. 묵직했다. 반짝! 거울에 반사된 은은한 빛이 방 안을 채웠다. 삼재의 두 번째 보물. 청동거울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뒤에 서서 훌쩍거리며 소매로 눈물을 닦던 더벅머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왕검, 아니 형님! 아까 느려터졌다고 한 말 취소해요!”
풍백 저 녀석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다. 아니 뒤끝이 있는 건가? 살자고 했던 짓인데 이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눈치 없고 먹을 것 밝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뒤끝에 집요하기까지? 이런 녀석과 앞으로 쭉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