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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비 Sep 07. 2024

의문의 구매자

감았던 눈을 떴다. 익숙한 고시원 천장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스마트폰을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스마트폰 중고거래 어플에 새 메시지를 알리는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관심 키워드로 등록해 놓은 중고 안전화 구매 알림 메시지였다. 마음에 드는 건 비싸고 가격이 맞는 건 너무 낡았거나 거래 희망 지역이 멀다. 화면을 닫으려다 문득 책상 위에 놓아둔 보따리에 눈이 갔다. 그렇지! 저거! 닫았던 중고 거래 어플을 다시 켜고 키워드를 타이핑했다.

‘골동품.’

화면 안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좌르륵 쏟아져 나왔다. 그림, 글씨, 도자기, 고서적, 각종 오래된 물건, 기념품까지.


'오오, 책도 있다, 있어! 나이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위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그리고 낡은 책을 꺼내 이리저리 돌려가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리고 중고 거래 어플에 판매 물품으로 등록했다.

‘옛날 책 팝니다. 상태 중하.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오던 책인데 저한테는 필요 없어서 내놓습니다. 내용은 한자로 되어 있어 모르니 질문 사양합니다. 번역 어플로 찍어봤는데 흘려 쓴 거라 그런지 인식이 잘 안됩니다. 참고하세요. 낡긴 했지만 빈티지 장식용으로 쓰기에 딱입니다. 저녁 8시 이후 백석역 직거래 원합니다. 가격 네고 사양합니다. 구경만 하실 분 연락하지 마세요. 진짜 사실 분만 연락하세요. 쿨 거래 하시면 한글로 된 책도 같이 드립니다. 메시지 남겨주시면 확인하는 대로 답장드립니다. 요청 시 추가 사진 가능합니다. 희망가격 10만 원.’

장례식장에서도 훔쳐가려고 했던 물건이니 틀림없이 팔릴 만한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10만 원이 적은 지 많은지 모르겠지만 제일 마음에 드는 안전화를 사고도 남은 돈으로 치맥까지 할 수 있다. 환웅이니, 왕검이니, 삼재 따위, 아이고 의미 없다.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다 무슨 소용? 당장 등 따숩고 배부르고 발 편안한 게 먼저지. 이미 공돈 10만 원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몰캉몰캉해졌다. 몰캉한 기분을 안고 흐뭇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에 놔둔 스마트폰부터 확인했다. 채팅 창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책에 관심 있어 연락드립니다. 책 내용 나온 사진 몇 장 부탁드립니다.’

새벽에 올라온 메시지였다. 주먹을 불끈 쥐며 만세를 불렀다. 내용을 보여달라고? 이거 혹시 내용만 미리 보고 안 사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다. 자판을 꾹꾹 눌러 메시지를 보냈다.

‘사실 건가요? 내용만 보고 안 사시면 곤란해서요.’

바로 답장이 왔다.

‘걱정 마세요. 삽니다.’

그래도 내용을 미주알고주알 다 보여줄 수는 없었다. 한쪽의 3분이 2만 나오게 사진을 네 장 찍어 추가로 올렸다. 사진이 올라가자 바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내용이 잘렸네요. 아무튼 확인했습니다. 오늘 거래 가능하신가요?’

이 책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비싼 거 아닐까? 일이 순조롭게 풀리니 어쩐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밑져야 본전, 한번 찔러나 보자.

‘사진도 보여드렸으니까요… 돈을 좀 더 올려 주시면… 급한 마음에 좀 싸게 올렸거든요. 가격 고쳐서 다시 올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연락을 주셔서… 어떻게, 안될까요?’

바로 답이 왔다.

‘얼마나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고 싶어서 몸이 달았구먼? 자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하다. 얼마를 불러야 많지도 적지도 않을까? 고민 끝에 답장을 보냈다.

‘30만 원 정도…’

상대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너무 많이 불렀나? 조금 깎아 줄 수 있다고 할까? 초조해하고 있는 순간 채팅창에 답 메시지가 올라왔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상대는 잠시 뜸을 들였다.

‘책에 나온 물건들 때문에 그 책을 사려고 하는 건데…. 그 물건까지 찾아서 한꺼번에 넘기는 걸로. 금액은 500. 물건 찾는데 쓴 돈은 별도로 드리고. 기한은 한 달. 어떠십니까?’

물건? 그 삼재인가 뭔가 그걸 말하는 건가? 그게 어디 있는지 알아야 찾든지 말든지 할게 아닌가. 그나저나 나도 며칠 전에야 알게 된 건데, 이 사람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의심도 잠시 돈을 많이 주겠다는 말에 피어올랐던 의아함이 금세 사방으로 흩어졌다.

‘천부인인가.. 뭐 그 세 가지요? 그게 어디 있는데요?’
‘천부인 세 가지 맞습니다. 어디 있는지는 책에 적혀 있을 겁니다. 찾아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오케이 하시는 겁니까?’
‘이거 뭐 불법적인… 그런 거 아니죠?’
‘전혀요. 사실 따지고 보면 님 집안 물건 아닙니까? 물건 주인이 찾아서 판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 집안 물건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파격적인 조건이라 꺼림칙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만약 한 달 안에 못 찾으면요?’

초조하게 답 메시지를 기다렸다.

‘당연히 거래는 취소됩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기한 연장도 가능합니다. 자세한 조건이나 내용은 그때 다시 말씀 나누는 걸로. 이제 다 된 겁니까?’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당장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 기왕 모양 빠지게 된 거 끝까지 손 벌려 보는 수밖에.

‘저기… 착수금으로… 100만 원만 먼저 주실 수 있나요? 제 통장이 지금 텅장이라서…. 남으면 돌려드릴게요.’
‘계좌는?’
’00뱅크 000-0000-000-00요.’

띠링하고 알림음이 울렸다. 메시지 창을 확인하니 00뱅크 계좌에 100만 원이 입금되었다고 찍혀 있었다. 놀랄 틈도 없이 채팅 창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관심 없습니다. 물건만 찾으면. 남으면 알아서 하시고. 모자라면 추가 요청.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
‘연락은 어떻게….’
‘이 채팅방을 이용합시다. 필요할 때 언제든.’
‘네 알겠습니다.’
‘이동 수단은 필요 없습니까? 차량이나 바이크 같은.’
‘오오…. 그런 것까지! 근데 면허가 없어서….’
‘알겠습니다. 이걸로 거래 성립.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죄송한데…, 혹시 뭐 하는 분인지 여쭤봐도….’
‘골동품에 관심 많은 사람입니다.’

한참을 이어가던 대화가 끝났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뭔가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기분이었다. 중고 거래 어플을 닫고 은행 어플을 띄웠다. 계좌에 입금 100만 원이 똑똑히 찍혀있었다. 꿈도 아니고 홀린 것도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반환도 없고, 영수증 증빙도 없다. 그야말로 개꿀 조건이다. 책이랑 물건을 비싼 값에 팔 수 있게 된 것만도 충분한데 눈먼 활동비까지 챙길 수 있게 되다니. 우선 그 물건들이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야 했다. 책을 잘 살펴보라고 했지? 책상 위에 늘어놨던 두 권의 책 중 낡은 책을 집어 들었다. 뜻 모를 한자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번에는 한글로 쓰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알아볼 수 있어 머리가 훨씬 덜 아팠다. 몇 번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봤지만 그 사람이 말한 내용은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 답 없는 한자를 어떻게든 해석해야 하는 건가 싶어 책을 덮으려던 순간이었다. 책장을 훑던 엄지 손가락에 딱딱한 느낌이 전해졌다. 맨 마지막 페이지가 다른 페이지보다 두꺼워 엄지손가락을 대고 촤르륵 넘길 때 걸렸던 모양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두 페이지가 서로 달라붙어 있었다. 아마 물에 젖었다가 마르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비춰보니 테두리만 붙고 나머지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리고 붙어 있는 안쪽에 뭔가 글씨가 비쳐 보였다. 책상 위에 뒹굴고 있던 커터칼을 찾아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붙어 있던 페이지가 양쪽으로 펼쳐졌다. 그곳에는 세 곳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담양, 원통, 애월. 쓰여있는 자리나 모양새, 흔적을 보면 주소는 시차를 두고 쓰인 듯했다. 뭔가 찾아냈다는 흥분은 그 정체를 해석하지 못하자 금세 식어버렸다. 책을 다시 책상 위에 던져두고 침대에 누웠다. 100만 원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걸로 우선 삼겹살에 소주나 실컷 먹을까? 아니다. 돼지고기가 웬 말? 소고기지! 암 공돈에는 소고기지. 소고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행복한 고민에 키득거리던 순간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빙글빙글 돌며 머리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담양, 원통, 애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반년 이상 먹고 자면서 일했던 현장들이잖아!'


가만 생각해 보면 세 지역 모두 큰 공사나 일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었다. 일거리가 더 많은 지역을 놔두고 굳이? 아버지에게 뭔가 의미 있는 곳이었을까? 고향? 그러기엔 공통점이 너무 없다. 조상 묘지? 책에 따르면 가문의 본거지는 북쪽이다. 지금은 갈 수 없는. 그럼 친구? 아버지한테 그런 게 있었나? 그렇다면 남은 건 그것밖에 없다. 그 사람이 말한 거. 삼재! 설렘과 흥분으로 두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빨리 찾으면 거래의 칼자루는 내가 쥐게 되는 거야. 진행비를 최대한 많이 뜯어내고, 물건 값도 더 두둑이 받아내야지. 할 수 있어! 가방에 보따리와 손에 집히는 몇 가지 물건을 챙겨 고시원을 나왔다.

‘그 사람… 그걸 정말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갑자기 떠오른 찝찝한 생각을 고개를 세차게 저어 털어냈다.


'기대도 안 했는데 이렇게 큰돈이 되는 걸 보면 아버지가 남겨준 환웅이니 삼재니 하는 것들이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나 봐.'


급 유쾌해진 마음으로 도착한 강남 고속터미널. 잠시 후 나는 광주행 고속버스 막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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