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실현하시겠습니까?

by 오늘비

“뭐가 있다고?”
“조약돌, 풍선 그리고 김 가루인데요….”
사건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폴리스 라인을 들어 올리던 진수가 천천히 뒤로 돌아 머리 하나는 더 큰 재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재준의 눈이 안경테 위쪽으로 치켜뜬 진수의 눈과 마주쳤다. 당황한 재준이 수첩을 뒤적이며 허둥거렸다. 상대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진수의 눈빛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죽은 노승일의 입 속에서 ….”

재준을 쳐다보던 진수가 폴리스 라인 안쪽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노승일 신상 샅샅이 파악해. 주변 사람들까지.”
“노승일 신상이요? 왜….”

재준의 반문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한마디를 더 던지고 집 안으로 사라졌다.

“최근 실종 신고 된 6~7세 아동 명단도 확보하고.”

폴리스 라인이 쳐 있는 현관 앞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재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무리 레전드라지만 제멋대로 구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번번이 이렇게 무시를 당하니 기분 좋을 리 없다. 승용차로 다가서는 재준의 발걸음이 거칠었다.

‘반장, 서장도 신경 쓰지 않는 양반이니 갓 신입 딱지를 뗀 나 따위가 보일리 있겠어?’

재준은 한숨을 크게 내뱉고 골목 끝에 세워둔 승용차에 올라탔다. 차가 조용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진수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정복 경찰이 알아보고 거수경례를 했다. 먼저 도착한 형사들과 감식반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시신과 시신 주변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거 어딨어? 입 속에서 나온 거!”

진수는 시신을 조사하고 있는 감식반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거 찾는 거야?”

등 뒤에서 대답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감식반 뱀눈깔 최호진이다. 내일모레면 정년으로 집에 가야 할 사람이 아직도 현장에서 설치고 있다. 뱀눈깔은 신참 시절부터 결정적인 현장 증거를 귀신 같이 찾아낸 덕분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진수도 한창때 최호진의 신세를 진 적이 몇 번 있었다. 나이도 성격도 비슷해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어 버렸다. 최호진이 증거수집용 비닐봉지 세 개를 조심스럽게 들어 보였다.

“보시다시피. 요 검은 덩어리들은 조사해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입 주변하고 바닥에서 김 가루로 보이는 검은 부스러기들이 나온 걸 보면, 같은 것일 가능성이 높아. 누군가 입 속에 넣다가 흘린 걸로 보이고….”

세 가지 증거물을 확인하는 진수의 표정은 한 톨의 동요도 없었다. 진수의 표정을 살피던 최호진이 조용히 물었다.

“이거… 그거지? 그렇지?”

진수는 증거물 봉투에서 눈도 떼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진수의 머릿속에는 20년 전 5월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휴일 오후의 놀이동산. 20대 중반의 혈기 넘치는 신참 형사였던 진수는 그날 비번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부리나케 놀이동산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놀이동산 입구는 이미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었고, 불만과 놀라움이 섞인 표정의 가족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나오는 가족마다 입구를 통제하는 경찰들이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출입구 쪽 지원해!”

무전기를 들고 출입구 근처에 서 있던 박반장이 진수에게 말했다. 놀이동산을 나오는 사람들의 신분증을 확인하는 동료에 합류해 오가는 무전 내용과 경찰들의 상황 보고 등을 종합해 보니 6살 정도 되는 아이 하나가 실종된 상태였다.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오전 열한 시쯤 자리를 떴던 아이가 6시간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직원들과 인근 파출소 경찰까지 동원되어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아이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 혼자 나갔을 가능성을 고려해 모든 출구의 근무자들을 확인했지만 혼자 지나가는 아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놀이동산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남자는 다짜고짜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를 바꾸라고 했다.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부모가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한껏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부모를 나무랐다. 사람 많은 놀이동산에서 아이를 혼자 보내는 건 부모의 자격이 없는 거라고, 자격 없는 당신들은 평생 후회와 반성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런 기회를 준 나에게 감사하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떠들던 목소리는 이쪽에서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6시간과 한 통의 전화가 이 사건을 단순한 실종에서 끔찍한 범죄로 바꿔놓았고 대대적인 경찰의 개입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놀이동산 안에서는 직원들은 물론 인근 경찰서의 전경들까지 총동원되어 실종된 아이를 찾고 있었다. 입구 근처에는 무전기를 든 박반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 옆쪽에는 젊은 여자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었다.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여자를 끌어안고 달래고 있었다. 진수가 박반장 쪽으로 다가서는 순간 박반장이 들고 있던 무전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찾았습니다! 아이를 찾았어요!”

박반장이 입구 쪽으로 달려가며 물었다.

“어디야? 살아있어?”

진수도 박반장을 따라 뛰었다.

“그건… 아무튼 빨리 오세요. 귀신의 집 괴수 인형 아랩니다!”

어두운 귀신의 집 안에는 손전등 불빛만 어지럽게 흔들리며 가득 차 있었다. 귀신의 집 공포체험 코스 중간쯤, 관람객이 지나는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커다란 괴수 인형 아래에 아이가 잠들어 있는 것처럼 누워있었다. 손전등 불빛 속의 아이 얼굴은 창백하고 차가웠다. 갑작스럽게 주변이 환해지며 눈이 부셨다. 누군가 관리자에게 연락해 귀신의 집 안의 조명을 켠 모양이었다. 조명 아래 드러난 귀신의 집 안은 공포와 거리가 먼 조악하고 초라한 고물 전시장 같았다. 때마침 들어온 감식반이 아이의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입 속에서 나온 것이 조약돌과 풍선 그리고 김가루였다. 조약돌과 풍선은 놀이동산 가판대에서 사서 아이가 들고 다녔던 것이었고, 김가루는 그날 도시락으로 싸 온 김밥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더 이상의 증거는 없었다. 경찰의 조사를 통해 당일 동선이 의심스러운 몇몇의 용의자를 찾아냈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해 아이를 해친 범인이 누군지 끝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수사에 참여했던 진수는 절망스러웠다. 분명 저 사람들 가운데 진범이 있는데 무기력하게 풀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진수는 가장 의심스러운 용의자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조사하다가 제 분을 못 이겨 폭력을 휘두르고 말았고, 이 일로 진수 본인은 징계, 가장 유력했던 용의자는 경찰의 폭력적인 조사에 희생된 억울한 피해자로 둔갑해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진수를 보고 선배들은 격려하기도 하고 설치다가 일을 망쳤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간신히 분노와 수치심을 억누르고 있던 진수를 박반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용의자들이 모두 풀려나자 온갖 비난과 질책이 경찰에게 쏟아졌다. 실종 살해 아동 가족 단체를 시작으로 억울하게 죽은 아이를 애도하는 시민들이 사건 현장과 경찰서 주변을 조약돌에 묶은 풍선으로 장식했다. 죽은 아이의 입에서 나온 증거물을 애도의 증표로 삼은 것이었다. 슬픔과 분노도 시간 앞에서는 영원할 수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반년이 지나자 경찰서 담장에 묶여 있던 추모의 풍선들도 하나 둘 줄어들고 있었다. 진수는 절망과 무기력에 빠져 살았다. 하지만 주저앉아 마냥 넋 놓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형사일에 매달렸다.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세상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 엉망진창이 될 것 같아서였다.
책상에 앉아 한창 조사 중인 사건의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던 진수 앞에 박반장이 파일철 하나를 툭 소리 나게 던졌다. 놀란 진수가 책상 앞에 버티고 선 박반장을 올려다봤다. 박반장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진수는 박반장이 던져 놓은 파일철을 집어 들어 펼쳤다. 40대 남자가 피살된 사건 관련 수사 자료였다. 시큰둥하게 넘겨보던 진수의 시선이 한 장의 사진에서 멈췄다. 사진 속에는 엄지 손가락 한마디 만한 조약돌과 찢어진 파란 풍선 그리고 검은 덩어리가 찍혀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살해된 남자의 입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검은 덩어리는 김가루였고, 남자가 발견된 동네 약수터 뒤쪽 수풀 바닥과 입 주변에서도 같은 것으로 보이는 가루가 발견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진수는 번개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미제 사건 자료들이 보관된 캐비닛을 열었다. 그 안에서 6개월 전 놀이동산에서 발견된 유괴 사건의 파일철을 찾아냈다. 그리고 다급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조약돌, 풍선, 김가루…. 흔하지 않은 물건들이 전혀 다른 사건 현장에서, 그것도 살해된 사람의 입 속에서 발견됐다. 진수는 검지 손가락으로 파일철을 톡 톡 두드렸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야!’

서류를 몇 장 더 넘기던 진수의 눈에 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나타났다. 진수를 자극해 손찌검을 유도해서 선량한 피해자로 둔갑해 유유히 빠져나갔던, 진수에게 형사로서의 절망과 자괴감을 맛보게 해 준 장본인. 놀이동산 아이 유괴 사건 당시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던 남자의 이름이 박반장이 던져준 파일철 속 피해자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양쪽 자료를 대조한 끝에 진수는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용의자의 신원을 알고 동일한 증거물을 남긴다는 건 결코 우연일 수 없었다. 그 둘 모두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진수는 보고 있던 파일철을 책상 위에 던져둔 채 사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실종 살해 아동 가족 단체의 사무실 안에는 각종 피켓과 현수막, 유인물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 옆으로 형형색색의 풍선들이 조약돌을 매단 하얀 실에 묶여 곳곳에 놓여 있었다. 사무실 한쪽에 아직 불지 않은 풍선이 박스채로 놓여 있고 그 옆에 바람을 넣기 위한 가스통과 조약돌이 가득 찬 비닐봉지, 실꾸러미 따위가 놓여 있었다. 본능적으로 사무실을 살피며 앉아 있는 사이 문이 열리고 6개월 전 놀이동산에서 아이를 잃은 엄마가 들어왔다. 뒤따라 아빠도 들어왔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진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같은 상처를 가진 부모들이라… 여기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뵙자고 했습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아이 아빠가 먼저 했다.

“가장 유력했던 용의자가…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진수의 말에도 엄마와 아빠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형사님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그 사람 말인가요?”

아이 엄마가 진수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진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숨겼지만… 죗값은 피할 수 없었나 보네요.”

한동안 말이 없던 진수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고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부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도 아이 엄마가 말했다.

“진짜 범인이 꼭 죗값을 받을 거라고… 믿고 있었을 뿐이죠. 형사님도 그렇게 믿지 않으셨나요?”

진수는 아이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죽은 사람의 입 속에서… 그것들이 나왔습니다. 아이 입 속에 있던 것과 같은….”

아이 엄마는 진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이 엄마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혹시, 혹시라도 말입니다….”

아이 엄마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진수의 눈빛을 모두 빨아들일 것처럼 어둡고 깊었다. 털끝만큼의 표정 변화도 없는 아이 엄마의 얼굴을 보며 진수는 범인을 앞에 두고도 풀어 줄 수밖에 없었던 그날 맛보았던 절망감을 또 한 번 느끼고 있었다.

“안 좋은 쪽으로… 다시 뵙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괴로운 일이 될 테니까요. 저나 두 분이나….”

아이 엄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정의만 잘 지켜진다면, 그걸 지켜야 할 사람들이 제대로만 한다면. 형사님과 우리 부부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요?”

말없이 아이 엄마를 바라보고 있던 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사로서의 직감이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 부부가 약수터에서 죽은 남자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지만 증명할 방법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털어낼 수 없는 고통을 평생 감당해야 할 피해자를 동시에 범인으로 의심해야 하는 상황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무실을 가로질러 문으로 향하는 진수의 발걸음은 복잡했다.

‘법이 지켜주지 못한 사람들, 법의 구멍 때문에 더 큰 상처를 받고 오히려 모욕을 감수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고 가로막는 게 내 일이야? 그게 내가 지키고 싶었던 정의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수가 잡고 있던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진수가 사무실을 나가는 동안 부부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잘 가라는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죄지은 자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고 형사가 됐지만 현실은 이상과 너무나 달랐다. 현장은 절망과 모순의 벌판이었다. 자신이 죄의 대가를 제대로 묻지 못한 탓에 죄지은 자는 풀려나고 죄짓지 않아도 될 사람들까지 죄를 짓게 되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자 또 한 번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 몰려들었다. 휘청거리며 건물 계단을 내려와 출입문을 나서는 진수의 어깨를 누군가의 손이 붙들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돌아보니 박반장이었다.

“꼬락서니 하고는…. 진짜 형사질 좀 해볼래? 나쁜 놈들한테 확실하게 죄 값도 치르게 하고 말이야. 할 거야 말 거야? 해볼 생각이면 따라와.”

말을 마친 박반장이 진수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뒤돌아 걸었다. 진수는 자석에 끌려가는 쇠구슬처럼 박반장을 따라갔다. 그날 이후 박반장은 혹독하게 진수를 몰아붙였다. 단기 속성 과외의 족집개 강사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과 경험을 진수에게 가르쳤다. 박반장의 30년 노하우와 타고난 형사로서의 직감, 욕심 덕분에 진수는 오래지 않아 관할 경찰서 검거율 레전드가 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사로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검거율 전국 1위까지 찍으며 명실상부한 에이스가 됐다. 동시에 한번 꽂히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끝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어 늘어진 탓에 ‘미친개’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박반장은 단순히 진수에게 수사의 노하우만을 전수해 준 것이 아니었다. 수사팀이 놓치고 있었던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 미궁에 빠질 수 있었던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아무도 찾지 못했던 증거들을 번번이 박반장이 찾아내는 것이 가끔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사건이 해결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의심은 사라지고 없어졌으니까. 하지만 의심의 꼬리가 언제나 숨겨져 있을 수는 없었다. 조사 중인 사건의 중간 보고서를 박반장의 책상 위에 내려놓고 돌아서던 진수는 반장의 책상 서랍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냥 둘까 하다가 신다 벗어놓은 양말이나 속옷이라도 있으면 냄새가 날 것 같아 닫으려고 허리를 굽힌 순간 서랍 틈에서 뭔가가 진수의 눈길을 끌었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조심스럽게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고무풍선이 들어 있었다. 서랍 한 구석에는 풍선을 잡아매는 조약돌이 들어 있었고, 뜯지 않은 조미김도 몇 개가 함께 뒹굴고 있었다. 당황해서 고개를 드는 순간 언제 들어왔는지 박반장이 책 상 옆에 서 있었다.

“바.. 반장님!”

박반장은 진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 앉아 발로 열려 있던 책상 서랍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돋보기안경을 쓰고 진수가 올려놓은 중간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진수는 어정쩡하게 서서 박반장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었다.

“손녀 지은이 선물이다. 할아비가 주는 풍선을 제일 좋아하거든. 김은 지난번 참치집에서 먹다 남은 거고. 너도 같이 가지 않았냐?”

당황한 진수가 머뭇거리며 계속 서 있자 박반장이 돋보기 테 위로 눈을 치켜뜨고 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해? 어이! 미친개 형사! 하다 하다 이제 나까지 물어뜯을 셈이냐?”

머쓱해진 진수가 고개를 숙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박반장의 나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상대를 가리면 미친개가 아니지…. 물었으면 어떻게든 목줄을 끊는 게 진짜 미친 개지. 저리 물러나면… 아직 멀었어. 덜 미쳤어. 어리바리해….”

진수가 말 뜻을 이해 못 해 멍하고 있는 사이 박반장이 중간 보고서를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수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보고서를 탁 소리가 나게 책상 위에 올려놨다. 잠시 진수를 바라보던 박반장이 한마디를 던지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수고했어. 계속 진행해.”

멍하니 나가는 박반장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진수가 박반장이 던져 놓고 간 중간 보고서로 시선을 옮겼다. 보고서 사이에 뭔가 끼어 있었다. 손을 뻗어 잡아당기니 매끄럽게 서류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세 가지 물건이 찍혀 있었다. 조약돌과 풍선과 김가루. 박반장의 책상을 쳐다보던 진수는 전기에 감전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 보고서가 보관된 기록실로 달려갔다.
진수는 세 건의 사건 기록에서 조약돌, 풍선, 김가루의 흔적을 찾아냈다. 살해 수법도 다르고 피해자 사이의 공통점도 없어서 알고 찾지 않는 한 세 사건의 관계성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박반장이 이 사진을 준 이유는 이 세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조사 중이던 사건을 다른 형사에게 맡기고 며칠 동안 자료실을 뒤져가며 알아낸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 세 사람 모두 어린이 유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사람들이라는 것.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불충분해 풀려났고 그 후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것. 그리고 그 살해 현장에는 조약돌과 풍선 그리고 김가루가 떨어져 있었다는 것. 진수는 자료실을 나와 사무실로 달려갔다. 박반장이 자신의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수는 자신이 찾아낸 사건 서류들을 거칠게 반장의 책상에 내려놨다.

“반장님, 이거 뭡니까?”

거친 숨을 몰아쉬는 진수를 돋보기 너머로 올려다보던 반장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돋보기를 벗어 책상에 내려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박반장은 서두르지 않는 걸음걸이로 앞장서 걸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진수는 반장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경찰서 주차장으로 나온 반장이 자신의 차에 올라타며 진수를 돌아봤다.

“어딜 가시는 거예요?”

진수의 신경질적인 물음에도 박반장은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잔소리 말고 타.”

박반장의 자동차가 복잡한 시내 거리를 달렸다. 달리는 동안 진수는 운전하는 박반장의 옆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박반장은 무심히 앞만 보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진수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박반장의 목소리가 한 발 먼저 흘러나왔다.

“분명히 범인인데… 범인이 맞는데… 잡아 처넣을 수도 없고… 처넣어도 시간이 되면 다시 기어 나오고… 당한 사람들 속은 다 썩어 문드러졌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절차와 규정을 따라 조사하고 잡아넣는 것 밖에 없더라… 이 말이지.”

어느새 자동차는 혼잡한 서울 시내를 벗어나 강변북로와 이어진 자유로를 달리고 있었다.

“나쁜 놈 잡아서 좋은 세상 만들자고 형사가 됐는데… 어렵게 나쁜 놈들 잡아봐야 증거니 뭐니 해서 다 풀어주고, 30년 동안 나쁜 놈들 잡았지만 세상이 눈곱만큼도 좋아지지 않은 것 같고… 너도 알지? 이런 엿 같은 기분 말이야.”

뜻밖의 말에 놀랐지만 진수는 박반장의 옆얼굴에서 여전히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 자식이 범인 맞았다. 놀이동산 귀신의 집 어린이 사건 말이야. 그날 내가 현장에서 분명히 들었지. 아무도 안 보는 줄 알고 혼자 낄낄거리면서 내가 죽였다고 말하는 걸. 나랑 눈이 마주치니까 씩 웃어 보이더니 입을 딱 다물었어. 그 뒤로는 너도 알고 있는 것처럼 증거가 없어서 풀어줄 수밖에 없었고. 내가 들었다고 하지만 녹음을 해놓은 것도 아니고, 비디오로 찍어 놓은 것도 아니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지. 네가 아니었으면 아마 내가 그 자식 반쯤 죽여놨을 거다.”

창 밖으로 철책과 한강의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놈 풀어주고 나서 죽은 애 사진을 다시 찾아봤다. 우리 지은이도 금방 저렇게 클 텐데… 저렇게 놀이동산 가자고 할 텐데… 그 생각이 드니까 참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그놈 주소지를 향해 차를 몰았지. 제법 그럴싸한 신축 오피스텔에 살고 있더구만. 근처 골목에 차를 세웠어. 그때까지도 내가 풍선과 조약돌을 쥐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 아마 그놈 얼굴에 그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 니가 죽인 그 불쌍한 애한테 미안한 마음이 없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던 거지. 알아. 나답지 않은 짓이라는 거.”

자동차가 IC를 빠져나가며 크게 오른쪽으로 돌고 있었다. 논과 밭, 창고와 아파트가 뒤섞인 풍경 한복판을 달리고 있었다.

“마침 그놈이 건물 밖으로 나오더군. 그놈은 운동복을 입고 있었어. 차에서 내려 뒤를 따라갔어. 놈이 근처에 있는 산길로 들어서고 있었어. 평일 저녁 시간이라 산을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 충분히 거리를 두고 따라가다 보니 녀석이 운동기구가 마련된 약수터에 앉아 있는 게 보였지. 놈에게 다가갔어. 나를 알아보고 빙글빙글 웃더구만. 그리고 폭력 경찰 두목이 여긴 어쩐 일이냐며 비아냥거렸지. 그놈 얼굴 앞에 풍선과 조약돌을 내밀었어. 그리고 소리쳤지.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죄를 고백하고 죗값을 받으라고. 그 어린애가 불쌍하지도 않았냐고.”

아파트 단지 사이를 달리던 자동차가 좁은 지방도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풍경이 사라지고 산과, 개천, 비닐하우스와 창고들이 드문드문 지나가고 있었다.

“그놈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어. 그 웃음을 본 순간 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던 것 같아.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그놈을 깔고 앉아 목을 조르고 있었지. 놈은 이미 죽은 것 같았어. 들고 왔던 조약돌과 풍선을 그놈 입 속에 처넣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들어 있던 김 봉지에서 김을 꺼내…. 그땐 잘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죽은 아이의 복수 비슷한 게 아니었나 싶었다. 자, 내리지.”

박반장이 산 밑 허름한 창고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진수도 따라 내렸다. 박반장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창고 출입문 손잡이에 채워진 커다란 자물쇠를 열었다.

“준비 됐나? 진짜 정의로운 형사질의 세계로 들어갈?”

진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박반장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하긴… 이제 와서 싫다고 한들 되돌아갈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 끝까지 가보자고.”

박반장이 힘겹게 출입문 한쪽을 옆으로 밀었다. 쇠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문이 조금씩 열리며 어두운 창고 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갔다. 한 사람이 드나들 정도로 문이 열렸다. 박반장은 진수를 힐끗 쳐다보고 창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수도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열린 문틈만큼 햇살이 들고 있지만 창고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창고 안의 풍경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텅 빈 창고 한가운데 뭔가가 있었다. 박반장을 따라 몇 걸음 다가섰다. 그러다 흠칫 놀라 제자리에 섰다. 그건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의자에 앉은 채로 묶여 있었다. 다가서는 인기척에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신을 잃은 상태인 것 같았다. 다가서는 진수의 팔을 박반장이 붙들었다.

“법은 도구일 뿐이지. 정말 중요한 건 정의를 실현하는 거야.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정의가 필요한 사람들이 직접 말이야. 약수터에서 그놈을 죽인 날 깨달았지. 30년 동안 내가 반쪽 짜리 정의를 위해 살아왔다는 걸. 나머지 반쪽을 채울 방법을 찾았다는 걸. 지금 이 앞에 있는 것도 그 깨달음이 가져다준 실천의 일부지.”

당황한 진수가 박반장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반장님! 미쳤어요? 정신 차려요? 저 사람 도대체 뭐예요?”

박반장이 묶여 있는 사람 쪽으로 홀린 듯 다가서고 있었다.

“저놈은 파렴치한 강도 살인범이야. 길거리에서 야채 파는 할머니를 따라가 머리를 내려치고 주머니의 돈을 훔쳤지. 저건 인간의 탈을 썼지만 사실 짐승일 뿐이야. 그래서 내가 심판을 내리려고 하는 거지.”

박반장의 눈이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반장님! 이건 범죄라고요! 살인이라고요!”

진수가 의자에 묶인 사람 쪽으로 다가서고 있는 박반장의 앞을 막아섰다. 박반장의 빛나는 눈이 진수를 지그시 쳐다봤다.

“내내 지켜봤다. 너도 나랑 같은 종이야. 정의를 지켜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거지. 받아들여. 내 시간은 여기까지다. 이제 너의 시간이다.”

박반장의 손이 움직인다고 생각한 순간 한쪽 팔을 잡힌 진수의 몸이 공중을 한 바퀴 돌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박반장의 업어치기에 제대로 당한 것이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숨이 막혔다. 그대로 누운 채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박반장을 막아야 했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는 진수의 뒤통수에서 번갯불이 번쩍였다. 진수는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야가 좁아지고 정신이 가물거렸다. 진수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있었지만 손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무기력하게 박반장이 하는 일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박반장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기계처럼 묶여 있는 남자의 배에 칼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입 속에 조약돌과 풍선과 김을 쑤셔 넣었다.

“살인자는 죽여도 되는가? 그건 살인인가 심판인가? 정의의 실현인가? 이 질문을 수백, 수천 번 곱씹었다. 그래서 결국 답을 얻었지. 나 역시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인간이라고. 그게 내 한계고 모순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건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한 준비고 시행착오였던 거지. 세례 요한인가? 뭐 그 사람처럼…. 진수야, 나는 너의 길을 준비한 인도자다. 니가 정의를 마저 지켜라.”

말을 마친 박반장은 묶여 있던 사람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수의 팔다리에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진수가 꿈틀거리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잊지 말아라. 정의의 실현은 니가 직접 하는 게 아니라. 정의가 필요한 사람이 할 수 있도록…. 넌 그저 돕기만 해라. 너에게 해주는 내 마지막 수업이다.”

말을 마친 박반장이 주머니 들어 있던 수첩 꺼내 진수 앞에 던져 놓았다. 높이 치켜든 박반장의 목울대가 크게 움찔거렸다. 잠시 후 바닥에 쓰러져 신음소리와 함께 몸부림치던 박반장의 몸이 조용히 늘어졌다. 감지 못한 박반장의 눈이 초점 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첩에 적힌 박반장의 자백은 경찰뿐만 아니라 세상을 발칵 뒤집어놨다. 법의 한계와 사적제재에 대한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왔다. 다시 한번 경찰서의 담장에 형형색색의 풍선들이 매달렸다. 박반장의 용기와 신념을 응원하는 상징이었다. 풍선의 장벽 앞에는 피켓들이 늘어섰다. 법과 질서가 무너지면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고 만다는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였다. 진수의 마음은 복잡했다. 복잡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적제재를 둘러싼 논쟁이나 박반장에 대한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얼떨결에 떠맡게 된 정의의 실현을 위한 사명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박반장이 떠맡기고 간 비밀 때문이었다.

사건 현장 입구에서 누군가가 진수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에 진수의 생각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최호진이 들고 있던 증거물 봉투를 바라보던 진수가 폴리스 라인을 걷어올리고 현장 밖으로 나왔다. 진수의 지시에 따라 죽은 노승일의 주변을 조사하러 갔던 재준이 진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님! 죽은 노승일 말입니다. 얼마 전까지 유괴 사건 용의자로 조사를 받다가 풀려났어요. 제일 유력한 용의자였는데 증거가 없어서….”

진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 말 없이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쉽게 끊을 수 없는 습관이다.

“조사하다 알게 된 건데요, 비슷한 사건이 더 있었더라고요. 유괴 용의자가 피해자이면서 입에서 물건들이 나온 사건이요. 가장 최근 사건이 3년 전이었어요.”

의외의 사실을 발견해 흥분한 재준의 말에도 진수는 동요하지 않았다. 3년이 걸렸다. 정의가 다시 실현되기까지. 사람들의 마음이 나약해졌던 것일까? 아니면 정의를 필요로하지 않을 만큼 무감각해진 것일까. 모든 것이 풍요롭고 남아도는 시대라서 사랑도 고통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흔해 빠져서 가치가 떨어진 덕분일까. 누구나 정의를 필요로 한다고 하지만 직접 추구하는 일은 어렵다. 그것이 내 자식을 죽인 명백한 악당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재준은 제가 조사한 내용을 풀어놓고 있다. 진수는 담배 한 가치를 더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인 연기를 멀리 날려 보냈다.
박반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난 이후 진수는 철저히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주었고, 최후의 정의를 실현할 기회까지 제공했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었다. 박반장이 마지막에 남긴 당부처럼. 그건 그들의 역할이고 몫이었다. 흥분하며 날뛰던 사람들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꼬리를 내렸다. 진수는 그럴 때마다 답답해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진수 본인이 대신 일을 마무리하려고 달려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 박반장의 말이 진수를 끝까지 가지 않도록 붙들었다. 정의 실현을 위한 자신의 일이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부모들은 달랐다. 조용하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그들은 진수의 제안에 한 톨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해야 할 일을 깔끔하게 해치웠다. 오랜만에 진수는 짜릿한 만족감을 맛보았다. 그동안 희미해졌던 자신의 존재와 가치가 다시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주소 문자로 보내주세요. 그쪽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진수가 재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살인 사건이 또 일어났대요. 거기서도 조약돌, 풍선, 김이 나왔고요.”

재준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 화면을 켜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여기서 멀지 않아요. 제 차로 가시죠.”

차에 앉아 시동을 거는 순간 재준이 스마트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라, 또 살인 사건인데요….”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진수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꺼내서 화면을 켜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자 제한 번호로 사진 한 장이 전송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사진을 열었다. 사진 속에는 조약돌과 풍선 그리고 김이 있었다.

“선배님… 이게 무슨….”

시동을 걸던 재준이 계속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보며 진수에게 말했다. 여러 건의 살인 사건이 계속 보고되고 있었다. 그때마다 진수의 스마트폰으로 사진이 전송됐다.

“여기로 가!”

진수가 재준 승용차의 내비게이션에서 주소지 하나를 검색해 목적지로 설정했다.

“예? 현장으로 안 가고요?”

“여기가 현장이야! 빨리 가기나 해!”

의아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던 재준이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시내를 지나 자유로로 접어들었다. 철책과 한강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IC를 크게 돌아 논과 밭, 창고와 아파트가 어우러진 길을 달렸다. 곧 허름한 창고가 나타났다. 창고 앞에는 승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재준이 승합차 옆에 차를 세웠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진수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냉정한 표정의 부부의 눈빛에서 보았던 익숙한 느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정의와 상관없는 살인을 갈망하는 충동과 광기였다. 자살하기 직전 박반장의 눈에서 빛나고 있던 것, 파렴치한 범죄자들의 눈에서 빛나고 있던 것. 진수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번에 열여 젖힌 것이 정의의 문이 아니라 죄악의 문이었다는 걸.

“정신 바짝 차려.”

진수의 말에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재준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안에 이 모든 살인을 저지른 범인들이 있다.”

“예? 그걸 어떻게...?”

진수는 재준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댔다. 그리고 창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나중에 다 설명하마. 문을 열면 동시에 들어가는 거야! 알았지?”

진수는 스마트폰을 꺼내 다른 형사에게 빨리 달려오라는 메시지와 함께 주소를 보냈다. 그리고 재준을 바라보고 입으로 소리 없이 숫자를 셋다. 하나, 둘, 셋! 진수가 멈칫하는 사이 재준 혼자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투닥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재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다. 정의는 내 손으로 실현하는 게 아니니까. 니 손으로 할 수밖에. 대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너의 희생은 헛되이 하지 않으마. 사이코패스 살인마 부부를 찾아내 죽인 영광은 꼭 너에게 주마.’

진수는 품 속에서 총을 뽑아 들고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진수가 빈 손으로 창고 밖으로 나왔다. 들고 있던 총은 지문을 지우고 재준의 손에 쥐어줬다. 이것으로 재준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부부를 잡다가 현장에서 순직한 영웅이 됐다. 후배 형사가 탄 승용차가 창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진수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차에게 내리는 형사에게 다가갔다.

‘이런. 깜빡했네. 재준이 입에 조약돌과 풍선과 김을 넣었어야 하는데. 나도 이제 물러날 때가 됐나?’

진수는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워 물고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이런저런 증거들은 뱀눈깔 최호진이 어떻게든 처리하겠지. 다시 한번 머금은 담배연기를 후련하게 내뱉었다.


* 특별히 한 줄 요약 해드림

: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겠다.

하지만 그 정의가 광기라면?

그 정의가 재미라면?

조약돌, 풍선, 김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형사.

그는 절대 담배를 끊을 수 없으리.


* '오늘비'이 뱀발 한뼘

: 사사로움과 공공성이 수시로 충돌하는 시대.

일진일퇴의 숨막히는 공방.

어느쪽으로 달려가야 할까?

나인가, 너인가, 아니면 우리인가.


(제목 이미지는 '뤼튼AI이미지'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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