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관 긴급전화입니다
평일 밤이었는데 한국 여자가 강간을 당했다고 파사이 경찰에서 연락이 와서 급히 담당 영사와 해당 경찰서를 찾았다. 이미 용의자는 잡혀서 수갑을 차고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얼굴이 좀 상해있었다. 먼저 피해자를 만났는데 예상했던 것과 분위기가 좀 달랐다.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였는데 어려서 필리핀에서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다는 그녀는 웃으며 따갈로그어로 경찰관들과 농담도 주고받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대사관에서 진짜로 올 줄은 몰랐다며 실제로 강간을 당한 것은 아니고 마닐라 국제공항 경비원으로 일하는 현지 남자와 사귀는 관계였는데 그 남자가 언제부터 연락도 받지 않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 화가 나서 허위로 신고를 했다고 자백했다. 대사관에서 어떻게 해주기를 원하냐고 물어보니 이미 남자는 경찰에게 혼은 좀 난 것 같지만 아까 경찰서에 끌려와서 본인을 보자마자 나중에 가만히 안 놔두겠다고 했다고 이제는 만나기가 무섭다며 접근 금지 약속을 받아달라는 것이다.
당황스러웠지만 담당 경찰에게 조사받던 그 남자와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담당 수사관은 알겠다는 듯이 우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들이 이미 때렸으니 옆 방으로 데려가서 때리면 된다며 부하 경찰을 불렀다.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니 대사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고 묻길래 그건 맞는데 우리가 왜 그 남자를 때리냐고 되물으니 중국 대사관에서 아니냐고 해서 한국 대사관에서 왔다고 신분증을 보여주니 그 경찰은 그제야 우리를 쳐다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착각했다며 중국 대사관에서 나온 영사나 직원들은 중국인에게 가해를 한 현지인이나 범죄를 저지른 중국인을 만나면 경찰에게 양해를 구하고 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강간범들은 예외 없이 때린단다.
가끔 공항에서 국외도피범 강제송환을 할 때 다른 대사관 직원들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중국 대사관 직원들은 서슬 퍼런 기세가 남달랐던 기억이 난다. 송환되는 범죄자들도 대사관 직원이나 호송관인 중국 공안들의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는 것 같았다. 중국으로 송환되는 범죄자들은 대부분 마약이나 부패사범 들인데 본토에 돌아가면 재판에서 중형을 피하기 어렵고 사형당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고 한다.
아무튼 우리는 그 남자에게 다시 저 여자에게 접촉을 하거나 협박을 하면 또 경찰에서 만나게 될 것이고 그때는 선처는 없을 거라고 하자 그 남자는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며 사건은 그대로 종료가 되었다. 필리핀도 아동과 부녀자에 대한 폭행은 일반 폭행보다 무거운 처벌로 다루고 있으며 강간의 경우는 더러 종신형을 받기도 한다. 반면에 허위신고를 한 경우에도 입증이 어려워 사실상 처벌은 없다시피 하니 이런 식으로 셋업을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마닐라 말라떼에서 2~3인조로 이모와 딸이라고 속이고 실제로는 포주와 여자가 짜고 미성년자 강간사건으로 신고하겠다며 주로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셋업을 일삼으며 합의금을 뜯어내던 일당이 있었는데 경찰서에서 나를 번번이 만나고 경찰에서도 한소리 듣고는 사업이 전처럼 잘 안된다며 다른 동네로 옮긴다는 말을 들었는데 실제로 그 후로는 못 만났다. 보통 관광객이 이런 일을 당하면 창피하기도 하고 성매매로 처벌받거나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워 공관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실제 피해사례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