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관 해외안전팀 사건수첩
어려서 살던 아파트에는 각 가구의 부엌에 쓰레기를 버리는 작은 문이 있어서 쓰레기를 비닐봉지에 담거나
혹은 그냥 거기에 버렸던 기억이 있다.
온 아파트의 쓰레기가 지하에 모이게 되고 잘 관리하지 않으면 냄새가 진동하고 쥐와 벌레가 끓는다.
이제 재활용품을 구분해서 수거하는 시스템이 정착한 지 오래라 우리나라에선 사라진 지 한참이지만
필리핀에는 아직도 그런 게 더러 있기도 하다.
마닐라의 한국계 은행에서 근무하는 은행원이 본인이 살던 고급 아파트의 쓰레기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쓰레기장에 바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 고층에서 쓰레기 투입구로 투신한 것이다.
CCTV에도 혼자 멍하니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시신은 참혹하다기보다 "왜 하필 여기로?"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누가 본인 삶의 최후를 쓰레기장에서 마감하고 싶어 할까?
사실 자살은 우울증 단계에서 순간적이고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 많아서 그 양태가 다양하다.
의외로 유서 같은 건 아예 없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마닐라에서 앙헬레스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운행 중에 권총자살한 경우도 보았다.
아무튼 이 은행원의 경우에는 자살인 것이 분명했지만 유가족은 그 원인이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며 산재로 처리해 달라며 지점장, 본사 측과 갈등을 벌였다.
민사문제는 공관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었고 사건 자체는 마무리되었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추가로 위로금을 받는 걸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유가족 입장에서는 금전적 보상이라도 받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 은행은 후임자를 뽑지 않고 현지직원만 충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발전소 현장에서 중간관리자로 근무하던 한국인도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가족에게 SNS 문자만 남기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는데 원청 대기업이 아닌 하청업체 소속 직원이라
초라하고 형식작인 장례식만 치르고 끝났다.
그래서 머슴살이를 해도 대감집에서 하라는 말이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