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관 해외안전팀 사건수첩
대사관은 보안시설이라 24시간 경비업체가 상주하고 있다.
한국인이 도움을 요청하려고 한 밤중에 대사관을 찾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보통은 전화로 내용을 들어보고 상담을 한 후에 면담을 하는 게 원칙이지만
이 남자는 통화는 도청이 된다고 거부하고 경비업체를 통해서 즉시 대사관으로 오라고 하여
새벽에 대사관으로 향했다.
30대 중후반 정도의 호리호리한 남자였는데 밝게 염색한 머리에 필리핀 같은 더운 나라에는
어울리지 않는 롱코트 차림을 하고 몹시 불안한 눈빛을 하고 땀 흘리고 있었다.
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마약으로 본인을 엮으려 한다며 증거를 가져왔단다.
보여달라고 하니 작은 열쇠고리를 꺼내는데 그걸 분해해야 한다면서 시계방에서 쓰는
작은 십자 드라이버를 달라고 하여 없다고 하니 열쇠고리를 바닥에 부딪혀서 그걸 부쉈는데
당연히 아무것도 안 나오니 분명히 아까는 있었다며 본인을 미친놈 취급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진정하라고 하니 대사관 주차장을 뛰어다니다가 한 20분쯤 지나니 힘이 빠졌는지 털썩 주저앉는다.
필리핀에는 샤부 Shabu라는 저질 메스암페타민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은 오락, 쾌락성 목적이 아니라 원래는 빈민층 남자들이
생계형 육체노동의 피로를 잊기 위해서 시작했다가 중독이 되어 나중엔 약값을 구하기 위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악순환이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된 형태이다.
일부는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중독이 되기도 하는데 이 남자가 딱 그런 경우이다.
한국계 미용실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남자는 일본식 가라오케 주점에서 만난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는데
이 여자를 통해서 샤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본인도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약을 끊으니
즉시 금단현상을 겪게 된 것이다.
금단현상의 증상은 몸으로만 느끼는 게 아니라 망상이 시작되고 주위의 사람 모두를
의심과 음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화는 다 도청되고 건네는 음식이나 물건에는 마약이 숨겨져 있으며
언제든지 경찰에 잡혀가서 평생 수감생활을 한다는 공포감이 엄습한다.
방법은 하나다. 도움을 요청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전문 시설에서 의료적 치료를 받는 것인데
약 때문에 이미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할 의지가 많이 약해진 경우가 많다.
대사관은 수사기관이 아니라 도움을 청하러 온 자국민을 현지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다.
이 남자는 그 후로도 몇 달에 한 번씩 밤늦게 대사관을 찾아오곤 하다가 직장도 그만두고
잠적했다. 부디 그 사이에 귀국하여 치료를 받아 회복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