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흉폭하다

영사관 해외안전팀 사건수첩

by 윤랑

60대 중반의 이 남자는 마닐라의 카지노에서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서 도박을 하다가 결국 다 잃고

빌린 돈을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의 숙소에 끌려갔는데 거기서 탈출하려고 이들과 싸우다가

그가 휘두른 식칼에 찔린 중국인 사채업자 중 한 명이 사망했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정당방위인 점과 고령인 것이 감안되어 다소 이례적으로 법원에서 보석허가가

되었지만 이 남자는 수중에 한 푼도 없는 데다 한국의 가족, 지인들과도 이미 오래전에 연을 끊은지라

보석금을 내줄 사람이 없었다.

대사관에서 금전대납을 해줄 수 없다고 하니 뻔뻔하게도 한인회에 알려서 교민들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해달라고 하던 게 기억난다.


그러다가 구치소에 수감이 되었는데 이 남자는 거의 매일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서 배고픔을 호소했다.

필리핀 수감시설도 당연히 수감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지만 양도 부족하고 맨밥에 생선 절임정도라서

당연히 배가 고프겠지만 그래도 지내다 보면 적응을 하게 마련인데 이 남자는 끈질기게 하루가 멀다 하고

‘언제 면회 오느냐, 라면박스를 준다고 들었는데 빨리 좀 가져와라’ 등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자주 전화를 해댔다.


전화가 조금 뜸해졌을까 하던 와중에 사고가 났다.

그 남자가 한밤중에 같은 방에 수감 중이었던 한국인 수감자 두 명의 얼굴에

끓는 물을 부어서 화상을 입힌 것이다.


바로 독방에 격리처분이 되어 당장 그와 통화는 불가능했지만

다친 동료 수감자를 통해서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매점에서 사 온 초코파이를 그에게 한 개만 주고 자기들이 두 개씩 먹어서 그랬단다.


나중에 독방에서 나온 남자와 직접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이런 나쁜 놈들이 감옥에서 호의호식하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정의감에 그랬단다.


원래 계획은 그냥 끓는 물이 아니라 밥알을 뜨거운 물에 개서 눈에 발라버려서 아예 장님으로 만들려고

했었는데 배가 고파서 밥을 먼저 먹는 바람에 그렇게 못한 게 아쉽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제 그는 칠십 노인이 되었는데 그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고 가족의 도움은커녕

연락을 받는 지인 한 명 조차 없는지 대략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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