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진상

영사관 해외안전팀 사건수첩

by 윤랑

이 남자는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하다고 귀국을 도와달라고 대사관에 전화로 도움을 요청했는데

막상 알아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로는 한국의 가족들이 귀국에 도움을 주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이 남자는 막내아들이었는데 부모님 재산을 몰래 처분해서 필리핀으로 도피한 후에

도박과 여자에 탕진한 지라 가족들이 이미 연을 끊은 지 십 년이 넘었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도와달라고 연락을 해대니 가족은 모든 연락을 차단해버렸다.

필자가 연락했을 때도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대사관 전화까지 차단한 상태였다.


두 번째는 이 남자가 국외로 도피한 수배자의 신분이라는 것이다.

근무하던 회사에서 공금을 횡령하여 고소당해서 수배가 내려진 상황이었는데

그렇다고 인터폴 수배까지는 아니어서 체포를 해서 송환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세 번째는 지금 민다나오의 시골에 예전에 만나던 현지인 여자의 고향 집에서 얹혀 사는

상황인데 그를 마닐라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없었고


네 번째는 당연히 비자연장도 몇 년째 안 하고 있는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 아니라 긴급구호 대상도 아닌 데다 수배자에 불법체류에 환자에

가족의 금전적인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게다가

이 남자의 태도도 처음엔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다가 상황을 설명하자 오히려 화를 내며

어눌한 말투지만 전화로 쌍욕을 매일같이 퍼부어 댔다.


그냥 욕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안 도와주면 대사관에 가서 본인 목을 잘라서 혈서를 쓰고 정문에 목을 매달겠다'

와 같은 그야말로 저주를 퍼붓는 수준이었다.


원래 지속적으로 욕을 하면 영사조력을 거부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해서는 끝날 일이 아니었고

매일같이 통화하는 담당자로서의 스트레스도 어마하게 커졌다.


일단 출국이 가능하도록 불법체류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원래 이민국에 본인이 출두해야 하지만 환자라고 사정사정하여 해결했다.

해당 지역의 영사협력원이 지역을 찾아가서 공항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또, 마닐라에서 숙소가 없어서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쉼터에서 며칠 지내도록 하였다.


모든 게 준비가 되자 돈 한푼 없다던 이 남자는 항공권을 본인 돈으로 구매했고

마닐라로 넘어와서 한국행 편도 비행기에 필자와 같이 탑승을 했다.

매일같이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붓던 남자는 필자를 만나자 .

'여기서 그냥 죽을 수는 없잖아요' 라며 세상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 남자는 수배가 있어서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휠체어를 탄 채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로 어떨게 되었는 지는 솔직히 그닥 알고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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