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부어진 그를 향한 넘치는 사랑과는 별개로 나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나의 삶에 찾아온 몇 번의 큰 격변은 내가 가지고 있던 작은 비빌 언덕들을 다 파괴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지진이 나면 여진이 남듯, 나의 삶은 계속 흔들렸다.
강원랜드를 제외한 국내 카지노는 외국인 등록증 또는 외국인의 여권을 가지고 출입이 가능하기에 한국인인 나는 그곳에 출입할 수 없었다.
마음과 같아서는 당장 그곳에 달려가 문 앞에서 주저앉아 울고 싶었지만 그것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난 그저 탕자의 아버지처럼 그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잡으러(?) 가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의 지인들에게 울며불며 짧은 중국어로 제발 그를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많은 이들이 날 불쌍히 여겨 그를 잡으러 그곳에 갔었지만 그에게 그것은 통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그를 자극하면 자극할수록 오히려 그는 더 그곳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늪에 빠져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빨리 가라앉는 사람처럼..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빚을 어느 정도 다 갚을만하면 다시 카지노에 방문했다.
땀 흘려 수고스럽게 번 돈으로 빚을 갚는 고통을 알면서도 그는 그 즐거움과 쾌락을 버릴 수 없었나 보다.
어느 날, 일하러 나간 사람이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 미명이 되어서야 퀭한 눈을 하고 돌아온 그의 손에는 결혼반지가 없었다.
도박에 미쳐있는 시즌엔 그는 집안에 있는 값나갈 것 같은 물건은 다 찾아 전당포에 맡겼다.
노트북, 목걸이 등..
얼마를두고 샀던 지금 그것이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헐값으로 넘겨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에게는 다만 얼마라도 내 손에 주어져 그걸로 비카라 몇 판을 더 할 수 있을지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결혼반지를 손에 끼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론 놀라우면서 한편으론 허탈했다.
우리의 결혼반지는 기성품이 아닌 남편이 디자인한 것이었다.
디자인이라 해서 독창적이진 않지만 나름 뜻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반지의 가운데 굵고 얇은 실이 쭉 둘러져 있었다.
보통 반지는 여자가 원하는 것을 고른다 하지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사람인 나는 남편에게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했었다.
기성품이 아닌 남편이 생각한 모양으로 반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전에 말한 것처럼 난 왜가 없는 사람이기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가 좋으면 나도 좋았다.
결혼한 지 오래 지나 친구들에게 반지를 자신이 디자인했다며, 인생을 살면서 굵고 가는 일들이 있을 것을 표현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야 그때의 그의 마음을 알았다.
그런데,
그 반지가 더 이상 그의 손에 없었다.
자식까지 파는 게 도박이라더니 이제 시작인 걸까 하는 두려움
어떻게 결혼반지를 맡길 생각을 하지? 이제 남편에게는 결혼과 가족은 안중에도 없는 걸까라는 생각
21세기에도 전당포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지갑은 물론 손가락에 남은 작은 금붙이 하나까지도 팔 정도의 열정으로 도박을 해버린 사람이 나의 남편이라는 허탈함.. 여러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남편은 어쩌면 내가 그를 버리고 떠났다면 더 홀가분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책임과 의무가 벗어나 자기의 욕망만 가득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것.
잘못을 고치고 노력하는 것보다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그냥 잘못가운데에서 마지막이 될 때까지 망가지는 것이 그에게는 편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아이를 데리고 그를 떠났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잘 살았을 것이다.
누군가 결혼한 적이 있냐, 애기는 없냐 물었을 때만 약간의 죄책감을 가진채 훈장처럼 그의 경험을 말하면서 살았겠지 싶다.
그리고 그때의 나도 그가 나 없이도 잘 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나도 그를 떠나 아이와 함께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면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 노력하며 살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니, 죄가운데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도박이 큰 죄라고 말하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와 나는 결국 같은 죄인일 것이고 죄의 양상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 조금 더 큰 죄, 조금 더 작은 죄라는게 하나님 앞에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린 모두 다 같은 죄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도 그 가운데 놓아두는 것이 나에겐 어려웠다.
반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진노하셨다.
로마서 1장 24절 '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로마서 1장 26절 '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로마서 1장 28절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그는 한편으론 사랑을 받으며 한편으론 내던져있었다. 빛이 없는 그곳에.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때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바랐던 적도 있었다.
갑자기 그가 회심하여 새사람이 되고 성격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을까?
오늘이 그가 탕자처럼 돌아올 그날은 아닐까?
하나님은 왜 그를 죄 가운데 놓아두실까? 언제까지일까? 어느때까지일까? 궁금했다.
삼십 대 중반을 살 동안 내 인생임에도 질문이 없었던 내 삶에
신앙생활에서도 성경을 읽으며 의심조차 하지 않고 순종적이던 나의 믿음에
"물음표"가 생겼다.